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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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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안 문제는 항상 똑같다: 정부이냐 아니면 시장이냐 뿐이다. 제3의 해결은 없다.”

루드비히 폰 미제스는 20세기 가장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사회 철학자들 중의 한 분이다. 그의 긴 그리고 생산성 높은 삶 속에서 그는 개별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목적 지향적으로 행동한다는 공리(公理)를 바탕으로 해서 경제학을 융합적이고 연역적인 과학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경제분석 자체는 (경제학자들이 갖고 있는 가치와는 상관 없다는 의미에서) ‘가치 중립적’이였을 지라도, 미제스는 인류를 위해 실용적인 유일한 경제정책은 어떤 제한도 없는 자유방임, 자유시장, 그리고 어떤 방해도 받지 않는 사유재산권 행사의 정책이라고 결론 내렸다. 정부의 역할은 그 나라의 영토 안에 있는 사람과 재산을 보호하는 데에만 엄격하게 제한되어야 한다고 했다.

미제스가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논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 자유시장과 노동분업 그리고 민간 자본투자의 확대가 인류의 번영과 번창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 사회주의는 현대 경제의 재앙이다. 왜냐하면 토지와 자본재의 개인 소유를 허용하지 않으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합리적인 가격 책정과 비용 평가를 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 시장 기능을 해치고 방해하는 정부 간섭은 비-생산적인데다 그 간섭은 점차 누적적일 수밖에 없다. 모든 간섭들을 제거하지 않는 한 그 결과는 반드시 사회주의로 이끈다.

미제스는 이런 견해를 견지하였고 국가통제주의와 집단주의가 점증하는 한 세기 동안 완강하게 진실을 고수하였다. 그러면서 미제스는 반-인플레이션적인 금본위(gold-standard)와 자유방임을 주장하면서 ‘타협하지 않는 학자’로 유명했다.

오스트리아와 미국에서 미제스는 대학의 어떤 유급 직책도 실질적으로 거부당했다. 그렇지만 그는 그의 강의를 당당하게 해나갔다. 1920년대 오스트리아 정부의 경제자문관으로서 미제스는 혼자 힘으로 오스트리아의 인플레이션을 늦출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개인 세미나’를 직접 이끌었다. 그 세미나는 유럽의 탁월한 젊은 경제학자들, 사회과학자들, 그리고 철학자들을 사로잡았다. 경제학에서 ‘신-오스트리아 학파(neo-Austrian School)’의 창립자로서, 그는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은 중앙은행에 의해 촉진된 인플레이션적인 은행 신용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1930년대 초 영국의 젊은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은 그의 이런 경기변동론을 대공황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이론으로 받아들였다.

나치 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간 미제스는 거기에서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들을 남겼다. 20년 넘는 가르침을 통해, 그는 다시 떠오르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영감을 미국에 불어 넣었다. 그의 가장 뛰어난 추종자인 하이에크(F. A. Hayek)는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동안 미제스의 경기변동론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하이에크는 이 업적으로 미제스가 죽은 1973년 이듬 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다.

미제스는 1881년 9월 29일 갈리치아(Galicia)의 렘베르그(Lemberg, 지금 Lviv) 시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철도 건설을 위해 일하는 빈의 건축 엔지니어였다. 미제스 부모 모두는 유명한 빈 집안 출신이었다. 그의 어머니의 삼촌인 란다우(Joachim Landau) 박사는 오스트리아 의회의 자유당(Liberal Party) 부대표(deputy)를 역임했다.

미제스는 20세기에 접어들어 빈 대학교에 입학하였고 좌파의 간섭주의를 지지했다. 젊은 미제스는 오스트리아 경제학파 창립의 저서라 할 수 있는 칼 멩거(Carl Menger)의 ‘경제학의 원리(Priciples of Economics)’를 접하였고, 그 즉시 경제학 분석의 단위로서 비현실적인 기계적인 방정식들보다는 개인 행위에 중점을 두는 오스트리아 방법론과 자유로운 시장경제의 지지로 돌아섰다.

미제스는 오스트리아의 위대한 경제학자인 뵘바베르크(Eugen von Böhm-Bawerk, 그의 많은 업적들 중에서도 명성을 떨친 업적은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이론을 무력화시켰다는 것이다)가 주도하는 빈 대학교의 유명한 세미나에서 유명한 박사-후(post-doctoral) 학생이 되었다.

미제스의 삶의 좌우명은 버질(Vergil)의 다음과 같은 글귀이다: 불행에 굴복하지 말고 더욱 과감하게 거슬러 가라(tu ne cede malis, sed contra audentior ito).

이 기간 동안 미제스는 그의 첫 번째 대작인 ‘화폐와 신용의 이론(The Theory of Money and Credit, 1912)을 집필했다. 이것은 한계효용과 가격의 일반 이론 속에 화폐 이론을 통합하는 것으로 그때까지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다(오늘날 우리는 이를 ‘거시경제학’을 ‘미시경제학’ 속에 통합한 것으로 부른다). 뵘바베르크(Böhm-Bawerk)와 그의 오스트리안 동료들은 미제스의 통합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화폐이론 없이 그대로 남겨두었다.

미제스는 그의 화폐이론에서 오랫동안 잊혀진 영국의 통화 학파의 원리를 다시 되살렸다. 185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널리 알려져 있던 통화 학파의 원리에 의하면, 화폐와 은행 신용의 증가는 단지 인플레이션과 경기변동만 야기할 뿐이며, 그래서 정부 정책은 100 퍼센트의 금본위에 동등한 정책을 유지해야 한다.

미제스는 이런 통찰력에 그의 경기변동 이론 요소들을 더했다. 즉, 은행에 의한 신용 팽창은 인플레이션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기업인들로 하여금 (기계, 건축 등) ‘높은 차순(higher orders)’의 자본재 부문에 지나치게 많은 투자를 하게 하는 반면 소비자재(consumer goods) 부문에는 지나치게 적은 투자를 하게 하여 잘못된 투자를 이끌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디플레이션을 야기한다.

문제는 인플레이션을 야기하는 은행 신용이 사업가에게 돈을 융자해줄 때 ‘유사-저축(pseudo-savings)’으로 위장한다는 점이다. 즉 은행 신용이 사업가로 하여금 소비자들이 실제 저축하고자 하는 것보다 더 많이 그들이 저축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하여 자본재 생산 투자에 필요한 자금이 충분히 조달될 것으로 믿게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인플레이션에 의한 경기 활황은 필연적으로 경기 침체의 과정을 수반한다. 그 과정은 시장이 잘못 된 투자를 정리하고 소비자의 선호와 수요를 가장 잘 충족시켜주는 투자 및 생산의 구조를 다시 확립하기 위하여 고통스럽지만 필요한 과정이다.

미제스와 그의 추종자인 하이에크는 1920년대 이 경기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해서, 미제스는 오만한 세상에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1920년대 널리 퍼져 있던 영원할 것만 같은 번영의 ‘신시대(New Era)’는 가짜이며 그것의 필연적인 종착점은 은행의 패닉과 경기침체이다. 하이에크는 과거 미제스 개인 세미나에서 영향력 있었던 학생인 로빈스(Lionel Robbins)의 초청을 받아 1931년 런던 경제학부에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갔다. 그곳에서 하이에크는 젊은 영국 경제학자들의 대부분을 이 이론의 추종자로 만들 수 있었다. 케인즈(John Maynard Keynes)와 그의 캠브리즈(Cambridge) 제자들과의 논박 과정에서, 하이에크는 ‘케인즈의 화폐 이론(Keynes’s Treatise on Money)’을 제압했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전쟁에서는 졌다. 그는 1936년 케인즈의 일반이론(Keynes’s General Theory)이 출판된 후 경제학계를 휩쓸었던 케인즈 혁명(Keynesian Revolution)의 물결에 그의 추종자 대부분을 잃었다.

미제스-하이에크의 경기변동에 대한 정책-처방은 케인즈의 그것과는 완전히 반대다. 미제스의 정책 처방은 다음과 같다: 활황 기간 동안 모든 은행 신용과 통화 팽창은 즉각 중단돼야 한다. 침체기에는 침체의 재조정 힘이 가능한 한 신속히 스스로 작동되도록 하기 위하여 자유방임에 엄격히 맡겨야 한다.

이뿐만 아니다. 미제스에 의하면 가장 나쁜 간섭의 형태는 실업을 야기하면서 가격이나 임금률을 지지하며, 화폐 공급을 늘리고 소비를 진작하기 위하여 정부지출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침체는 저-저축, 고-소비의 문제이다. 그래서 소비를 부추기보다는 그 반대로 저축과 검약을 장려하고 정부지출을 중가시키기보다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 1936년 이후 거시경제 정책에 있어서 세계 주류와 정 반대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사회주의-공산주의는 러시아를 비롯해 1차 세계대전 동안과 그 후의 유럽의 많은 국가들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은 미제스로 하여금 1920년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경제 계산’이라는 유명한 논문을 출판하게 했다. 그 논문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증명해 보였다: 가격과 비용 체계의 진짜는 재산권의 교환을 그래서 생산수단의 사유화를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사회주의 계산 당국이 현대 경제 시스템을 계획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더욱이 어떤 인위적인 ‘시장’을 시도하더라도 그 시장은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미제스는 이 논문을 그의 책 ‘사회주의(Socialism, 1922)’에서 발전시켜 나갔다. 이 책은 사회주의에 대해 철학적이고 사회적이며 경제적인 비판을 광범위 하게 담고 있다. 사회주의 비판을 위해 쓰여진 지금까지의 어떤 글보다 이 책은 사회주의를 가장 철저히 그리고 비참하게 괴멸시키는 내용을 담은 책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미제스의 이 책은 하이에크, 독일의 빌헬름 뢰프케(Wilhelm Röpke), 영국의 라이오널 로빈스(Lionel Robbins)를 포함해 저명한 많은 경제학자들과 사회철학자들을 사회주의에서 벗어나게 했다.

1936년 미국에서 ‘사회주의’의 영어 번역본이 출판되었다. 이 출판으로 저명한 경제 저널리스트인 헤즐릿(Henry Hazlit)은 미제스를 존경하게 되었다. 헤즐릿은 이 책을 New York Times에 소개했고 당대 미국의 가장 저명하고 학식이 높은 메튜스(J. B. Matthews)를 공산주의 추종에서 미제스 쪽으로 돌려놓았으며 모든 형태의 사회주의를 반대하도록 했다.

유럽과 미국에 퍼져 있던 사회주의자들은 거의 15년 동안 사회주의의 경제 계산 문제에 시름했다. 마침내 폴란드 경제학자인 랑게(Oskar Lange)가 1936년 ‘시장 사회주의(market socialism)’ 모델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고 선포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랑게는 폴란드 공산주의의 계획 입안을 돕기 위하여 폴란드로 돌아갔다. 1989년 폴란드를 비롯한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의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가 붕괴하자, 이념적 지평을 떠나 랑게의 ‘해결책’을 받아들였던 중진(重鎭)의 모든 경제학자들은 대단히 당황했다.

하일브로너(Robert Heilbroner)와 같은 몇몇 유명한 사회주의자들은 철저히 “미제스는 옳았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미제스는 옳았다(Mises was Right)”라는 구절은 New Orleans에서 있었던 Southern Economic Association의 1990년 연차 회합의 패널 주제 명이었다.)

사회주의가 경제적 대실패이라면, 정부의 간섭은 작동할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사회주의로 이끄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미제스는 이를 그의 비판 글 ‘간섭주의(Interventionism, 1929)’에서 정교하게 다듬었고, 그의 ‘자유주의(Liberalism, 1927)’에서 자유-방임 자유주의의 그의 정치 철학을 진전시켰다.

미제스는 20세기의 모든 정치 조류의 반대편에 섰다. 여기에다 그는 이와 동일한 열정과 설득력으로 당시 지배하고 있던 경제학과 여타 학문의 철학적이고 방법론에서 파멸적인 경향이라고 생각했던 것들과 싸워 나갔다. 여기에는 실증주의, 상대주의, 역사주의, 모든 민족과 성(性)은 그 자신의 ‘논리’를 갖고 있어서 다른 집단과는 소통할 수 없다는 다원논리주의(polylogism), 모든 형태의 비-합리주의, 그리고 객관적 진실의 거부가 포함된다. 또한 미제스는 명백한 공리에서 논리적 연역으로 경제이론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는 이를 ‘인간행동학(praxeology)’이라고 명명했으며, 경제이론의 알맞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경제학과 여타 학문들에서 비현실적인 수학적 모델과 통계 조작으로 인간행동학과 역사적 이해를 대체하려는 점증하는 경향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1940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영어로 쓴 미제스의 첫 번째 두 권의 책은 중요하고 영향력이 컸다. ‘전능한 정부(Omnipotent Government, 1944)’는 그 당시 표준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마르크스의 견해에, 즉 파시즘과 나치즘은 이들 국가에 거대한 사업가와 ‘자본가 계층’에 의해 강요된 결과라는 견해에, 도전하는 그의 첫번째 책이었다. 그의 책 ‘관료주의(Bureaucracy, 1944)’는 정부의 활동은 반드시 ‘관료주의적’일 수밖에 없으며 관료주의의 모든 악으로부터 반드시 고통을 겪게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의 정부 비판 글들 중 이 책을 뛰어 넘는 분석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미제스의 가장 기념비적인 업적은 ‘인간 행동(Human Action, 1949)’이다. 이것은 1차 세계대전 이후 첫 번째로 경제이론에 관한 광범위한 원리들을 담은 책이다. 이 책에서 미제스는 그의 고유한 방법론과 연구 프로그램에 도전했다. 그는 그만의 연역적인 ‘인간행동학적(praxeological)’ 원리들의 바탕 위에서 융합적이고 거대한 경제이론의 구조를 정교하게 다듬었다. ‘인간 행동’은 경제학자들과 정부들이 일반적으로 국가통제주의와 케인지안 인플레이션에 완전히 헌신하고 있을 시대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이 책은 경제학자들에 의해 읽혀지지 않았다. 결국, 미제스는 1957년 그의 마지막 주요 저서인 ‘이론과 역사(Theory and History)’를 출간했다. 여기에서 그는 마르크시즘과 역사주의를 반박했으며 이에 더해 경제학과 인간행동의 다양한 모든 원리들에서 이론과 역사의 근본적인 차이와 그것의 기능을 서술했다.

그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미제스는 돈을 받는 학술 직을 얻지 못했다. 1945년부터 1969년 88세 나이에 그가 은퇴할 때까지 그가 가르쳤던 뉴욕 대학교는 그에게 방문교수(Visiting Professor)라는 직을 준 유일한 곳이다. 그의 월급은 1962년까지 보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단체인 William Volker Fund로부터 그 후에는 자유-시장을 지지하는 단체와 사업가들의 협회로부터 받았다. 우호적이지 못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미제스 곁에는 학생들과 열렬 지지자들이 점차 많이 모여들기 시작했으며, 그는 이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고 그들의 학업에 용기를 주었다. 미제스 스스로는 그의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이어나갔다.

미제스는 자유-시장과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유지했고 이들과의 작업을 계속해서 수행해 나갔다. 미제스는 1946년 시작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 뉴욕의 Irvington-on-Hudson에 있는 Foundation for Economic Education의 시간제 간부 직을 맡았다. 1950년대에는 National Association of Manufacturers (NAM)의 경제자문의 직을 맡고서 자유방임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함께 일을 했지만, 이들은 ‘계몽적(enlightened)’이라는 국가통제주의의 물결에 힘을 잃었다.

Cobden, Bright, 그리고 Spencer의 전통 속에서 자유무역 지지자이며 고전적 자유주의자(liberal)로서의 미제스는 경제문제에서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성과 개인적 자유의 승리를 안겨준 자유론자(libertarian)였다. 합리주의자로서 그리고 모든 형태의 국가 통제의 반대자로서 미제스는 그 자신을 결코 ‘보수주의자(conservative)’라 부르려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19세기 의미에서의 진보주의자(liberal)라고 부르려고 했다.

사실, 미제스는 정치적으로 자유방임의 급진주의자였다. 그는 관세, 이민 제한, 도덕을 강요하려는 정부의 어떤 시도에도 반대했다. 반대로, 미제스는 문화적으로 그리고 사회학적으로 완고한 보수주의자였다. 그는 평등주의자를 공격했고 정치적인 페미니즘을 사회주의의 한 다면으로 강하게 비난했다. 자본주의에 대해 보수적으로 비판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미제스는 개인적 도덕성과 핵가족은 자유시장의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필연적이며 그 체제에 의해 강화된다고 주장했다.

미제스가 인식론의 그리고 정치적인 관점에서 비-대중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의 영향력은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1920년대 그의 학생들은 비록 후에 케인지안이 되었지만, 그들은 영원히 미제스의 명백한 영향력 하에 있었다. 이들 학생에는 Hayek와 Robbins을 포함해 Fritz Machlup, Gottfried von Haberler, Oskar Morgenstern, Alfred Schutz, Hugh Gaitskell, Howard S. Ellis, John Van Sickle, 그리고 Erich Voegelin이 있다.

프랑스에서는 드골(DeGaulle) 장군의 가까운 경제 및 통화 자문관이며 미제스의 오랜 친구이자 그를 존경했던 Jacques Rueff가 있다. 그는 프랑스를 사회주의를 벗어나게 한 사람이다. 루이지 에이나우디(Luigi Einaudi) 이탈리아 대통령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일정 기간 이탈리아를 사회주의로부터 벗어나게 했는데, 그는 뛰어난 경제학자이며 미제스의 오랜 친구이자 자유-시장의 동료였다. 미국에서 미제스의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그다지 좋지 못한 학문적 여건하에서도 그의 학생들과 지지자들에는 Henry Hazlitt, Lawrence Fertig, Percy Greaves, Jr., Bettina Bien Graeves, Hans F. Sennholz, William H. Peterson, Louis M. Spadaro, Israel M. Kirzner, Ralph Raico, George Reisman, 그리고 Murray N. Rothbard가 있다. 그러나 미제스는 사업가들과 비-학술적인 분야에서 아주 강력하고 충성적인 지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의 방대하고 종합적인 ‘인간행동’은 첫 출판 이후 지금까지 엄청나게 잘 팔리는 책이다.

미제스는 1973년 10월 10일 그의 나이 92세에 뉴욕에서 죽었다. 그 후 미제스의 가르침과 영향은 다시 활짝 피었다. 이듬해 미제스의 경기변동으로 하이에크는 노벨 상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첫 번째 오스트리안 학파의 컨퍼런스가 열렸다. 미제스의 책들은 재인쇄 되어 왔고 그의 글들은 문집으로 번역되고 출판되어 왔다. 오스트리안 경제학의 강좌와 프로그램들이 전국 곳곳에서 가르치고 열렸다.

Nation, State, and Economy

간섭주의정치 이론

01/01/1919Books
Mises takes up the question of the proper political order to sustain the peace in the age of democr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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