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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은 화폐의 철폐를 위한 소비에트의 도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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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s 화폐와 은행세계역사

06/15/2019

[Translated by Yisok Kim (김이석)]

1919년 3월, 블라디미르 레닌(Bradimir Lenin)이 이끄는 공산당은 새로운 강령의 초안에서 당의 목표 가운데 하나가 돈의 완전한 철폐라고 명시했다. 이에 따르면, 러시아 중앙은행은 “폐지되고 공산주의 사회의 중앙 회계사무소로 바뀔 것이다.”1 이론상으로는 집권당이 단순히 돈을 폐지한다고 법령을 선포하면 그만일지 모르지만, 당시 소련은 볼셰비키가 1919년에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했던 광대한 나라였기에 그런 법령의 선포로 소련 전체에서 화폐의 유통을 제거할 수는 없었다.

그 대신, 공산당의 전략은 인쇄기 의존이었다. 은행은 볼셰비키가 장악한 최초의 기관들 중 하나였다. 1917년 혁명 이후 볼셰비키의 통제를 공고하게 비밀경찰과 적군(Red Army)을 곧바로 조직했는데, 공산당의 화폐의 공급에 대한 통제권은 이들에게 급료를 지불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돈을 마구 찍어낸 것은 이런 급료지급과 같은 이유 이외에도 “필연적으로 도래할” 공산주의의 화폐가 없는 경제로 들어가기 위한 고의적인 전략의 한 부분이었다.

그 전략은 잘 먹혀들었지만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예언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공산당이 1919년에 화폐를 폐지하는 강령을 채택할 무렵 볼셰비키 정권은 이미 매달 통화 공급을 20억~30억 루블 추가했다. 그러나 이것은 약과였다. 5월에 이 정권은 중앙은행(“인민은행”으로 개칭)으로 하여금 새로운 통화를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발행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통화는 200억 루블 이하였다. 그러던 것이 1919년 말까지 통화 공급은 2천250억 루블로 증가했고, 1921년 중반에는 2조3천억 루블로 정말 엄청나게 늘어났다.2 그 다음 해에는 통화의 공급이 수천조 루블에 이르렀다.3

소련이 기근으로 침체중일 때, “색종이” 지폐 루블의 방출은 소련 경제에서 유일한 성장산업이었다. 당시 공산당 정권이 그런 색종이의 인쇄를 더 빠르게 하지 못하게 한 유일한 제약은 잉크와 종이의 부족뿐이었다. 그들이 은행 금고에서 압수한 금은 외국에서 인쇄용품들을 구입하는 데 쓰였다. 인쇄기는 논스톱으로 가동되었고 1919년 말 조폐국은 무려 1만4천명의 근로자를 고용했다.

제1차 공산당 강령이 만들어진지 2년 만에 의회의 참석자들은 통화를 팽창시켜 이를 퇴출시키는 노력이 거둔 성공에 열광했다. 대표적인 볼셰비키 경제계획가의 한 사람이었던 에브제니 프레오브라젠스키(Evgenii Preobrazhenskii)는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 혁명가들은 그들의 화폐의 가치를 원래 가치의 500분의 1로 떨어뜨렸지만 우리는 루블을 1917년 가치의 2만분의 1로 감소시켰다. 그는 “이것은 우리가 프랑스혁명을 40대 1로 앞섰다는 의미”라고 뽐냈다.4 인플레이션의 목표는 돈의 폐지였으며, 집권 엘리트는 돈 가치의 하락으로 그런 성공이 멀지 않았다고 자랑했다. 생존에 고단했던 농민들은 (루블 대신) 소금과 빵을 교환의 매개물(화폐)로 사용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돈의 파괴가 불가피하게 합리적 경제 질서를 도래시킬 것이라고 믿었지만 놀랍게도 그렇지 못했다. 질서 정연한 생산 대신 대중의 기아와 농민의 봉기가 귀결되었다. 마르크스의 예언에 대한 불굴의 믿음을 가졌던 볼셰비키들은 이 미스터리를 두고 씨름했지만 결국 그들은 러시아 경제에 대한 빈약한 통제마저 상실하고 말았다.

러시아가 인플레이션으로 경제를 문자 그대로의 죽음에 이르게 하는 동안, 많은 서구의 지식인들은 실패하고 있는 소비에트의 실험을 장밋빛 안경을 쓰고 바라보았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가 “사회주의 연방에서의 경제 계산”(Economic Calculation in the Socialist Commonwealth)[1]이라는 획기적인 에세이를 저술한 배경이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곧 이어서 나온 그의 두 번째 주요저술인 《사회주의》(Socialism)[2]와 함께)도 마찬가지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미제스에게 러시아 경제의 혼란은 전혀 수수께끼가 아니었다. 사유재산의 자발적 교환을 통해 형성된 시장 가격이 자원의 합리적인 배분의 필요조건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대표적인 볼셰비키의 한 사람은 마지못해 Mises의 위대한 통찰력을 인정하고 미제스의 통찰력을 “신경제정책”(New Economic Plan)으로 알려진 소박한 수준의 시장개혁의 기초로 삼았다. 니콜라이 부카린(Nikolai Bukharin)은 1925년 다음과 같이 썼다.

러시아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의 정책에 대한 부르주아 비평가들은 주로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은 제안을 해댔지만, 일부 의견은 그렇게 어리석지도 않았고 상대적인 진리를 담고 있었다. 공산주의에 대해 가장 정통한 비평가의 한사람인 오스트리아학파 Mises 교수는 1921~22년에 쓴 사회주의에 관한 책에서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 공산주의자들이 매를 들고 명령을 내려서 생산을 조정하려고하는 한, 그들의 정책은 불가피한 붕괴로 이끌 것이고 이미 이끌고 있다.5

사회주의에 대한 미제스의 비판이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대단한 칭찬은 아니지만 볼셰비키 이념가로서는 엄청난 양보였다. 부카린은 사회주의를 비난하기를 꺼려했지만, 신생 소비에트 국가의 붕괴를 막기 위해서는 시장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개혁에는 기능적인 화폐의 재도입이 포함되어 있었다.

1922년 말, 당은 (1923년 혁명 이전에 자유주의 개혁의 옹호자였던) “부르주아” 은행가 니콜라스 커틀러(Nicholas Kutler)에게 그들의 금융 위기 해결을 맡겼다. 커틀러의 해결책은 금본위제로의 복귀였다. 체르보넷(chervonets)으로 알려진 신(新)은행권은 금괴와 외환으로 뒷받침되었다. 향후 2년 동안 쓸모없던 루블은 금으로 뒷받침된 지폐로 대체되었는데 이에 따라 러시아 통화가 안정되었다. 사회주의 정책이 경제를 후퇴시키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데 당혹한 레닌은 이 조치가 임시적일 뿐이라면서 공산주의가 세계화되자마자 화폐가 사라질 것이고 (그 때가 되면 성공적으로) 금은 단지 화장실 만드는 데만 사용될 것이라고 강변했다.

‘신경제정책’의 개혁들을 너무 과장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통화개혁과 시장개방으로 러시아 경제가 완전히 파탄 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지만, 당은 여전히 그 나라 산업의 대부분을 계속 통제했다. 소폭의 경제자유화의 결과는 이에 수반하는 완만한 회복이었지만 이와 함께 당의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테러도 강화되었다. 볼셰비키들은 사람들에게 잠깐 숨 쉴 정도로만 경제에 대한 통제를 느슨하게 했을 뿐이었다. 원래의 실패들로부터 그리고 소폭의 개혁들에 의해 얻은 이익으로부터 교훈을 배우기는커녕, 조셉 스탈린이 장악한 당은 1920년대 말 비타협적인 무지막지한 경제통제로 돌아섰다. 그 결과 세계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가장 심각한 경제적 재앙이 기다리고 있었다.

볼셰비키의 인플레이션 정책이 주는 교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인플레이션 정책에 대한 찬성이 이제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의해 혹은 ‘무(無)화폐 경제’의 추구에 의해 정당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플레이션의 결과는 이론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작동한다. 현대통화이론(Modern Monetary Theory)의 인플레이션 원칙이 점차 대중화되고 있는데,[3] 우리는 볼셰비키의 인플레이션 역사를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정책의 목적에 관계없이 인플레이션은 경제 신호를 왜곡시키고 궁극적으로는 통화를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 통화를 쓰는 경제를 파괴하는 데 봉사한다.


글쓴이) Chris Calton

크리스 칼튼은 2018년 미제스연구소 연구위원으로 경제 사학자다. 그는 ‘역사 논쟁’(the Historical Controversies) 팟 캐스트의 작가이자 호스트다. 그의 YouTube 채널도 참조하라.


Yisok Kim (김이석) is chief editorial writer for Asiatoday, Seou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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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 Calton is a 2018 Mises Institute Research Fellow and an economic historian. He is writer and host of the Historical Controversies podcast.

See also his YouTube channel 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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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t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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