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wer & Market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이 필요한 비즈니스 스쿨

(김이석 역)

전 세계 비즈니스 스쿨1) 대학원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마케팅 책을 쓴 필립 코틀러(Philip Kotler)는 최근 트윗에서 정부가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1]

Kotler의 그 트윗을 인용하면:

소득불평등이 계속 악화되고 있다. 소득불평등 악화를 막을 4가지 방법은, 1. 최저임금 인상, 2. 최고 소득세율 인상, 3. 부유세 제정, 4. 재산세 인상이다. 한 정당은 이 모든 것에 반대하고 또 다른 정당은 이 모든 것을 시간을 두고 도입할 것이다.[2]

Kotler교수는 정부가 이러한 “해결책”을 어떻게든 장착해야한다고 제안함으로써 그가 마케팅과 전략에 관한 그의 생각—이 생각들은 통찰력이 있으며, 내가 위험부담을 감수하며 말하자면 대부분 정확하다—에 영향을 준 가장 근본적인 경제원칙들 일부에 대해 그가 (시카고대학과 MIT에서 학위를 취득한 프리드먼, 사무엘슨과 솔로우 교수의 학생이지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지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다른 매우 존경받는 비즈니스 스쿨 학자인 헨리 민츠버그(Henry Mintzberg)도 “최저임금 인상,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정부의 행동 필요성”을 주창하고 “승차공유 앱이 사람들을 가난하고 불행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그는 어떤 때는 심지어 이렇게 묻는다. “똑똑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멍청할 수 있나?”

그의 질문은 나로 하여금 이렇게 되묻게 한다. “그들의 분야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사람들이 경제학에 대해 (최소한으로 표현하더라도) 어떻게 그렇게 ‘순진할’(모를) 수 있는가? 더구나 경제학은 비즈니스에서 기초적 주제가 아닌가?”

이처럼 영향력 있는 학자가 취하는 이런 종류의 공공정책에 대한 자신의 입장 취하기는 비스니스 스쿨에서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을 진흥시키는 게 왜 중요한지 집중 조명해준다.

Kotler와 Mintzberg의 의견 제시는 90년대 초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의 미래”(The Future of Austrian Economics)에 대한 Murray Rothbard의 연설을 떠올리게 한다.3 Rothbard는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들이 그들의 아이디어를 학계 외부로 전파할 것을 주창했는데, 특히 기업가들을 중요한 청중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기업가들이야말로 바로 실제로 시장과정이 전개되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경제에서의 행동 주체들과 기업들이 모두 시장의 복잡한 거미줄 같은 상호작용의 망에 속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사람들이다.

특히 지금, 특별히 비즈니스 스쿨을 대상으로 삼아 Rothbard의 제안을 실행에 옮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비즈니스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건전한 경제 원리들을 기반으로 삼아 만들어지는 (비록 이 사실이 거의 직접 언급되지 않지만) ‘전략 및 마케팅’ 과목들을 수강한다. 그런 원리들의 예를 들자면, (집단이 아니라) 사람들이 행동한다는 것, 선호가 주관적이라는 것, 시장이 역동적이며, 기업에 대한 정부 정책의 영향이 존재하며 매우 중대하다는 것, 그리고 시장이 서로 연결되어있다는 것 등이다.

‘전략과 마케팅’을 수강하는 그 학생들이 실용성이 없는 다양한 경제 사상에 노출된다. 예를 들어, 화폐주의자, 케인즈주의자,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쓴 교과서들이 전 지구에 걸쳐 통상적인 교과서로 사용되고 있다. 미래의 전문가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이런 사상들이 아니라 경제학적 사고방식에 대한 보다 논리적인 접근이다.

다행히, 이 분야에서 우리는 진전을 보고 있다.

헌터 헤이스팅스(Hunter Hastings)가 주관하는 “기업가를 위한 경제학”(The Economics for Entrepreneurs) 팟캐스트(podcast)는 전략, 마케팅 및 기업가정신에 대한 토론과 함께 오스트리아학파의 건전한 경제학적 사고를 융합하고 있다. 미제스연구소(Mises Institute)와 관련된 몇몇 학자들도 비즈니스 프로그램에서 가르치고 있다. (예를 들면, Peter Klein, Per Bylund 그리고 Matt McCaffrey 등이 있다.) “Mises For Business” 그리고 “Management Scholars for Free Markets”와 같은 소셜 미디어 그룹도 등장했다. 또한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 경영, 그리고 비즈니스 전략에서의 개념들을 조합하는 수많은 학술논문들이 발표되고 있다.4 이런 변화들은 이미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여기에 기초해서 더 발전해갈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여전히 성장할 여지가 너무나 많다.

마케팅과 전략 외에도 비즈니스 스쿨이 인간행동학(praxeology)과 교환학(catallactics)을 공부함으로써 배울 수 있는 영역은 너무나 많다.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과 혁신(innovation)은 오스트리아학파가 기여할 수 있는 가장 명백한 분야 가운데 일부이고 인적 자원(human resources)과 금융(finance)과 같은 여타 주제들도 잠재적인 연구의 매우 강력한 후보들이다. 회계(accounting)는 오스트리아학파가 기여하기 시작한 또 다른 분야다. 산업 공학에 대한 개인적인 배경지식을 가진 필자는 심지어 경영분석과 같은 분야들이 비즈니스 사이클과 같은 문제와 특히 자본 구조에 대한 통찰력을 이해함으로써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약하면, 비즈니스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무수한 엉터리 경제학과 잘못된 이해들이 가르쳐지고 있다. 다수의 학생들은 반드시 수강해야 할 과목들을 들으면서 경제학 이론은 쓸모없으며 ‘데이터’가 모든 것을 해결한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프로그램일수록 오스트리아학파 혁명은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

오스트리아학파가 제공할 수 있는 시장과정에 대한 튼튼한 이해가 갖춰진다면, 비즈니스를 공부하는 학생들, 미래의 기업가들, 그리고 비즈니스 전문가들은 그들의 비즈니스를 더 잘 운영할 뿐만 아니라 소비자들과 경쟁업체들 그리고 그들이 처한 거시적 환경을 더 잘 이해할 준비가 더 잘 될 것이다. 더욱이 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시작함으로써 우리는 오스트리아학파-리버테리언 사상에 대한 여타 부분에 대한 문을 열 수 있을 것이고, 그 결과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중앙권력의 강제에 반대하고 개인의 자유를 믿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글쓴이) Fernando Monteiro D'Andrea

페르난도 몬테이로 당드레아는 경영엔지니어로, 전 비즈니스 컨설턴트이며 조교수였고, 현재 마케팅/혁신 박사 과정 중이다. 그는 오스트리아학파 아이디어의 비즈니스 분야 적용에, 특히 행동의 자유가 제약된 환경에서 기업가들이 어떻게 혁신을 통해 시장을 이끌어가는지에 관심이 있다. Instituto Mises Brasil 소속으로 전문분야는 경기변동, 시장과정과 경쟁, 그리고 기업가정신이다. 2017 미제스대학교 졸업생, 2018년 미제스연구소 섬머 펠로우였다. 그의 웹사이트 www.dodandrea.com을 방문하거나 twitter.com/dodandrea, facebook.com/dodandrea 및 LinkedIn/in/dodandrea 등에서 그를 팔로우 할 수 있다.

옮긴이) 김이석(아시아투데이 논설심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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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https://mises.org/power-market/business-schools-need-more-austrian-economics

《노예의 길》에서 하이에크가 보여준 통찰력

05/08/2019Gary Galles

[Translated by Yisok Kim (김이석)]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은 올해 출판 75주년을 맞았다. 이미 고전이 된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 출판됐는데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사실, 밀턴 프리드먼은 개인주의자를 만나면 “집단주의의 홍수” 속에서 어떻게 개인주의를 믿게 됐는지 묻는 관행을 지켜왔는데, 가장 빈번한 대답이 《노예의 길》과 관련된 것이었다고 밝혔었다.

노예의 길》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 중 하나이고, 또 나는 오랫동안 자유의 수호에 있어 최고의 명언들을 열렬하게 수집해왔기 때문에 (The Lines of Liberty 참조1)), 나는 이번 기회에 (자유에 관한) 성찰을 자극하기 위해 《노예의 길》에서 가장 통찰력이 넘치는 문장들을 모아보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예의 길》은 짧은 책이지만 이런 짧은 글 속에 모두 담기에는 그 속에 너무나 많은 명언들이 들어있음을 곧 깨달았다. 결과적으로 나는 3부로 이 명언들을 분류키로 결정했는데, 아래는 그 중 “제1부―자유 또는 강제” 편이다.

● 우리는 우리의 삶을 자신의 이상에 따라 꾸려갈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다.

● 우리는 지금 점점 더 빨리 경제문제에서의 자유를 포기하고 있지만, 과거 어느 시기에도 경제에서의 자유가 없이 개인적, 정치적 자유가 있어 본 적이 없다.

● 독창성의 자유로운 발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제거된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인간은 확대일로의 다양한 욕구들을 빠르게 충족시킬 수 있게 되었다.

● 기본원리는 우리의 문제를 푸는 데 있어 가능한 한 최대한 사회의 자연발생적 힘을 이용하는 한편, 가능한 한 최소한의 강제력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 정치적 자유의 위대한 사도(使徒)들에게 이 용어는 강제로부터의 자유, 다른 사람의 자의적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다.

● 아직도 대다수 사람들은 사회주의와 자유가 결합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 그렇지만 (사회주의) 계획의 실현은 자유의 파괴를 의미한다.

● 이렇게 우리가 미리 알 수 없는 자유로운 성장의 여지를 남겨 두어야 한다는 것이 정확하게 자유를 주장하는 근거이다.

● 현대 기술진보의 속성 가운데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포괄적 (중앙집권) 계획 쪽으로 향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는 것은 전혀 없다. 이에 반해 포괄적 계획을 담당할 중앙집권적 의사결정기구의 권력을 무한정 더 위험하게 할 요소들은 너무나 많다.

● 만약 사회를 계획하고자 가장 열광적인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계획하는 것을 조금도 용납하지 못한다.

● 법의 지배 아래에서는, 정부는 자의적 행동으로 개인들의 노력을 망쳐 놓지 못하게 된다. 알려진 경기규칙 안에서 개인은 정부의 권력이 자신의 노력을 좌절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고 확신하면서 자기의 개인적 목적과 욕구를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다.

● 냉정한 현실이 종종 사람들에게 부과하는 쓰라린 선택에 직면하여 사람들이 이런 선택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들 대신 다른 사람에 의해 그 선택이 이루어짐으로써 이런 선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 어떤 다른 자유의 전제조건인 경제적 자유는 … 선택권을 가진 상태에서 그 권리에 불가피하게 따르는 위험과 책임을 함께 지는, 우리의 경제활동의 자유를 의미할 따름이다.

● 사유재산 시스템은 유산자들에 못지않게 무산자들에게도 자유의 가장 중요한 보장책이다. 아무도 우리에 대해 완전한 권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은 … 오직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가 (여러 사람들에게) 나뉘어져 있기 때문이다. … 만약 모든 생산수단들이 한 사람의 손아귀에 귀속되어 있다면, … 이러한 통제를 행사하는 자가 우리에 대해 완전한 권력을 틀어쥐게 된다.

● 경제적 안전을 얻기 위해 자신의 자유를 반납하고자 했던 사람들이 언제나 그럴 의사가 없는 사람들의 자유도 마찬가지로 박탈할 것을 요구해왔다.

● 우리가 시장체제에 간섭하여 완전한 안전을 보장하려고 노력할수록 오히려 불안정이 더 커진다. 그리고 … 하나의 특권으로서 그런 보장을 획득한 사람들의 안정과 특권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점증하는 불안 사이의 대조가 더 커진다.

●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집단주의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휘두를 수 있는 전무후무한 막강한 권력을 창설해야 한다. … 경쟁사회에서는 사회주의 계획당국이 가질 권력의 한 조각만큼이라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경쟁체제는 분권화를 통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대해 행사하는 권력을 최소화하도록 하는 유일한 체제이고 …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본질적인 요소이다.

● 너무나 자주 “경제권력을 정치권력으로 대체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이는 필연적으로 항상 유한할 뿐인 권력을 전혀 탈출할 수 없는 절대 권력으로 대체하자는 의미이다. … 정치권력의 한 수단으로서 권력이 중앙으로 집중되면 그 권력은 노예제와 구별하기 어려운 종속 상태를 창출한다.

● 아마도 이렇게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 우리가 이해하는 본래 의미의 자유가 파괴되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자유의 파괴가 항상 사람들에게 약속된 새로운 자유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 ‘집단적 자유’는 … 사회구성원의 자유가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사회에 부과할 수 있는 계획자의 무제한적 자유이다.

● 지적 자유에 대한 경멸은 집단주의 신조를 끌어안았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 비인적(非人的)(한 개인의 의지에 의해 조종되지 않는) 시장에 의해 지배되는 질서와 몇몇 소수 개인들의 뜻에 따라 명령을 받는 질서 이외에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없다.

● 개인의 자유는 어떤 하나의 목적에 최고의 우월성을 부여하는 것과는, 즉 그 목적에 사회 전체로 하여금 완전히, 그리고 항구적으로 복종하도록 하는 것과는 양립할 수 없다.

● 자유와 계획 간 충돌은 더 심각해지지 않을 수 없다. … 계획의 규모가 증대할수록.

● ‘자유로운 인간들’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 실로 개인의 자유를 위한 정책이 유일한 진보적 정책이라는 핵심 원리는 19세기에 진리였듯이 현재에도 여전히 진리이다.

자유와 강제를 놀랍도록 현저하게 대조시키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능력이 바로 그의 책 《노예의 길》이 사려 깊은 독자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한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이 점은 그가 이 책을 썼던 1944년과 마찬가지로 출판된 후 7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가 1944년 이후 여러 측면에서 잘못된 길을 따라 가기로 선택했던 탓에 하이에크의 자유에 대한 통찰력은 여전히―자유를 적출해내려는 무수한 중앙집권적 노력으로부터―우리의 자유를 지켜낼 우리의 능력에서 핵심적 중요성을 차지하고 있다.


글쓴이) Gary Galles

게리 갤러스는 페퍼다인대학교(Pepperdine University) 경제학 교수이다. The Apostle of Peace: The Radical Mind of Leonard Read 등의 저술이 있다.


Yisok Kim is chief editorial writer for Asiatoday, Seou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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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자본주의에 관한 홀콤의 견해

04/27/2019David Gordon

[Translated by Sooyoun Hwang (황수연)]

랜들 G. 홀콤(Randall G. Holcombe), ≪정치적 자본주의: 경제 및 정치 권력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방식(Political Capitalism: How Economic and Political Power is Made and Maintained)≫, 케임브리지 대학교 출판부, 2018, X + 294페이지.

랜들 홀콤(Randall Holcombe)은 경제학자로서 공공선택론에 대한 자기의 연구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이 인상적인 새 책에서, 그는 공공선택론을 “엘리트 이론(elite theory)”과 결합함으로써 공공선택론에 역사적 차원을 더한다. 이렇게 하는 데서, 그는 새로운 경제 체제, “정치적 자본주의(political capitalism)”가 시장 자본주의를 대체하게 되었다는 논쟁적인 명제에 도달한다. 자기의 명제를 옹호하는 주장을 하는 데서, 홀콤은 경제학, 정치학, 그리고 사회학의 문헌에 관한 놀랄 만한 지식을 보인다.

“정치적 자본주의”라는 말로, 홀콤은 종종 “연고 자본주의(crony capitalism)”라고 불리는 것과 똑같은 것을 의미하는데, 그가 언급하듯이, 그 개념은 잘 확립되어 있는 개념이다. 상이한 정치적 견해들을 가진 사람들도 미국 경제가 엘리트 재계와 정계의 동맹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점에 광범위한 의견 일치가 있다. 데이비드 스톡먼(David Stockman)과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는 보통 불화하지만,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 스티글리츠는 주장한다, “‘우리는 높은 데 있는 사람들에게 과도한 권력을 주는 정치 체제를 가지고 있고, 그들은 그 권력을 재분배의 정도를 제한하는 데뿐만 아니라 게임의 규칙들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형성하는 데도 사용해 왔다.’ 그런 견해들에 공감하여, 스톡먼은 말한다. . . ‘국가는 자유 시장을 괴롭힌다고 주장되는 불완전들을 작아 보이게 하는 고유의 결함을 가지고 있는데, 즉 공공선(public good)의 이름으로 착수되는 정책들은, 자원들을 사회의 공유 자원에서 자기들 자신의 사적 목적을 위해 전유하는, 특수 이해 관계자들과 연고 자본가들에 의해 무정하게 포획된다.”(p. 5) (홀콤이 인용하는 많은 저작들 외에도, 헌터 루이스(Hunter Lewis)의 탁월한 책, ≪미국에서의 연고 자본주의(Crony Capitalism in America)≫도 이와 관련하여 언급할 가치가 있다.)

홀콤은 정치적 자본주의가 시장 자본주의 및 사회주의와 다른 새로운 체제라고 주장한다.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그 용어는 막스 베버(Max Weber)에서 유래하는데, 후자는 그것을 “고대 로마의 정치 및 경제 체제들을 서술하는” 데 사용했다(p. 8). 홀콤은 그 개념을 현대 미국에 적용한다. “뒤따르는 분석은 정치 및 경제 엘리트가 자기들 자신의 편익을 위해 체제를 통제하는 정치적 자본주의가 시장 자본주의가 아니며 별개의 경제 체제로서 분석되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p. ix) 내가 검토하고 싶은 것은 이 명제이다.

그는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과 고든 털럭(Gordon Tullock)에 의한 정부에 관한 공공선택 분석을 확대함으로써 그것을 옹호하는 주장을 한다. 이 경제학자들은 자유 시장이 공공재를 충분히 공급할 수 없고 그래서 정부 개입에 의해 보충될 필요가 있다는 표준적인 신고전학파 주장에, 비록 그들이 그것을 완전히 거부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도전했다. 표준적인 견해에서는, 자기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경제 행위자들은, 공공재를 생산하는 데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여, “무임승차하는(free ride)” 경향이 있을 것이다. 그 결과는 그것의 과소 생산이다.

뷰캐넌과 털럭은, 비록 신고전학파 모형의 가정들에 도전하지 않고 그렇게 하긴 했지만, 표준적인 견해의 정책 결론들의 설득력을 약화시키는 통렬한 질문을 제기했다. 정책 결정자들이 시장 행위자들보다 자기 이익을 덜 추구한다고 왜 가정하는가? “정부는 전지(全知)하지 않다. 정책 결정자들은 자원들을 이론적으로 최적인 후생 극대치에 일치하도록 배분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정부는 자비롭지 않다. 정부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민간 부문에서 사람들이 하는 것과 꼭 같이 자기들 자신의 이익을 지킨다. 공공 정책이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유인이 고려될 필요가 있다.”(p. 14)

뷰캐넌과 털럭은 집단 착취의 이론들(theories of group exploitation)을 거부했지만, 홀콤은 동의하지 않는다. “뷰캐넌과 털럭은 ‘또한 지배 계급에 의한 피지배 계급의 착취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어떠한 집합체 이론이나 관념도 거부했다. 이것은 정체(政體)를 경제적으로 지배적인 집단이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의지를 강요하는 하나의 수단으로서 구체화하는 마르크스주의 비전을 포함한다,’ 정치적 의사 결정을 분석하는 공공선택 접근법은, 뷰캐넌과 털럭이 그것을 이해하는 바로는, 이 장[과 책]의 주제인 집단 행동과 엘리트 이론들을 위한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pp. 64-65)

홀콤은 어떻게 개개 행위자들의 동기에 대한 뷰캐넌과 털럭의 강조를 거부하지 않고 집단 착취 이론들을 받아들이는가? 그 수수께끼에 대한 열쇠는 코스 정리(Coase theorem)에 있다. “거래 비용이 낮을 때, 사람들은 낮은 거래 비용 집단의 구성원들―교섭할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가치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자원들을 배분하도록 교섭할 수 있다. 거래 비용이 높을 때, 사람들은 자기들에 대한 가치를 극대화하게 자원들을 배분하도록 교섭할 수 없을 것이다. . . 낮은 거래 비용 집단에 있는 사람들은 공공 정책을 만들도록 서로 교섭한다. 높은 거래 비용 집단에 있는 사람들은 . . . 낮은 거래 비용 집단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설계된 정책들의 지배를 받는 처지가 된다. 낮은 거래 비용 집단에 있는 사람들은 엘리트(elite)이다. 높은 거래 비용 집단에 있는 사람들은 대중(masses)이다.”(p. 76)

거래 비용에서의 이러한 차이는 엘리트 이론이 필요로 하는 시간에 걸친 연속성을 허용한다. 차이가 지속되는 한, 엘리트 집단이나 계급에 의한 오래 지속되는 지배가 가능하다. 예를 들면, 국회에서 현직자들은, 정당과 상관없이, 종종 도전자들에 대항해 제휴한다. 그들을 내쫓는 어려움 때문에, 그들은 상당한 기간 동안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정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유지하도록 공모하는데, 서로와 공유하는 것이 그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같은 정당의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보다 더 많다. . . 정치적 경쟁의 더 중요한 차원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 대 그 권력을 얻으려는 그들의 도전자들 사이의 경쟁이지, 한 정당 대 다른 정당의 경쟁이 아니다. 이것은 정치적 자본주의에서 진실이지만, 또한 일반 정부에 대해서도 진실이다.”(p. 191)

홀콤은 지대 추구(rent-seeking)와 규제적 포획(regulatory capture)의 메커니즘들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데, 이것들에 의해 정부에서 엘리트들은 대중들을 착취하기 위해 힘을 모은다. 연합을 지배하는 것이 정부 이익인지 기업 이익인지 말하는 것은 때때로 어렵다. 한 책략에서, 입법부는 일정 이해 관계자들에게 불리하게 영향을 미칠 법률들을 통과시키겠다고 위협하여, 입법부가 자기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도록 유도하기 위해 이해 당사자들이 “기부금(donations)”을 제공하도록 유도할 것이다. “정부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입법 조치 혹은 비(非)조치와 교환으로 지불을 뜯어낼 유인을 가지고 있고 지불하고 있는 사람들은 비용이 자기들에게 부과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계속해서 지불할 유인을 가지고 있다.”(p. 129)

홀콤의 주장은 그것 자신의 용어들 안에서는 강력하지만, 그것은 머리 로스버드(Murray Rothbard)의 더욱 광범위한 접근법이 피하는 한계를 겪는다. 요컨대, 공공선택학파는 말한다, “정치가들은, 모든 사람의 행복을 목표로 삼는, 불편부당한 공복들이 아니다. 그들도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자들이다.” 모든 사람의 지배적인 동기는 부(富)를 얻는 것이고, 이데올로기적 고려 대상들은 사소한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현직자들은 왜 권력을 유지하기를 원하는가? 홀콤이 그 문제를 이해하는 바로는 주된 이유는 경제적 지대를 뜯어내는 것이다.

로스버드는, 비록 그가 또한 사람들의 경제적 자기 이익도 강조하지만, 사상에 의해 지배되는 것들에 훨씬 더 많은 여지를 허용한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미국 독립 혁명을 일으켰는데, 부분적으로 그들이 독립 선언서에 표명된 이상을 진정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레닌은 진정으로 공산주의를 믿었다. 그는 백만장자가 되기 위해 10월 혁명을 시작하지 않았다. 물론 이 두 혁명도 역시 다른 사람들의 희생으로 어떤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었다는 점은 진실이다.

이 주장에 대해 잘 알려져 있는 공공선택론 응답이 있는데, 고든 털럭의 ≪사회적 딜레마(The Social Dilemma)≫에 가장 잘 표현되어 있다. 혁명 행동은 공공재여서, 이데올로기적 혁명가들은 다른 혁명가들의 행동에 무임승차하기를 선호할 것이고, 따라서 자신에 대한 비용을 피할 것이다. 설사 이 분석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털럭과 기타 공공선택론 해설자들이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증명하는 것이 더 적다. 털럭은 표준적인 신고전학파 공공재 분석을 혁명들에 적용했지만,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표준적인 모형은 공공재가 효율적으로 공급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그것은 그 재화가 전혀 제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만약 털럭이 옳다면, 아마도 우리는 이데올로기적인 혁명들을 효율적인 양보다 더 적게 가질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은 우리가 그것들의 약간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정치적 자본주의의 유해한 효과들을 고려할 때, 홀콤은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당연히 궁금하게 여긴다. 그는 자기 책이 개선 조치보다는 주로 그 체제의 분석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말하지만, 그는 국가의 권력을 헌법적 견제와 균형을 통해 제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정말 제안한다. 그러한 한계들은 탐욕스런 정부를 방해하겠다는 어떤 약속을 지키게 한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진보주의 운동(Progressive movement)은 기업 약탈을 제한하는 정부 조치를 지지했지만, 이것은 작동하지 않았다. “진보주의 이데올로기는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어떤 사람들에게 경제적 편익을 주기 위해 폭력의 사용을 정당화한다.”(p. 230) 홀콤의 제안들은 유리하고, 그는 ≪자유에서 민주주의로(From Liberty to Democracy)≫에서 이 주제에 관해 더 자세하게 통찰력 있고 박식하게 썼다.

정치적 자본주의에는 또 하나의 한계가 있는데,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정치적 자본주의가 새로운 경제 체제라는 홀콤의 중심 명제에 도전할 필요가 있다. 미제스의 관점에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중간적인 경제 체제는 없다. 미제스가 표명하듯이, “바로 그 생산 요소들에 관해서는 오직 사적 통제 아니면 공적 통제만 존재할 수 있다.”(≪인간 행동(Human Action)≫, 학자판, p. 712) 홀콤의 책에서 분석된 종류의 조치들은 자유 시장을 방해하지만, 그것들은 자원들을 효율적으로 배분할 대안적인 방식이 되지 않는다. 만약 정치적 자본주의가 “제3의 체제(third system)”라면, 그것은 계산 문제(calculation problem)에 직면할 것이다. 경제 계산은 자유 시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정치적 자본주의는 본래적으로 자유 시장에 기생하는데, 이 점은 그것이[정치적 자본주의가] 끼칠 수 있는 피해에 대한 장애물이다. 그것의 나쁜 결과들을 고려하면, 그 점은 작은 위안이다.


글쓴이) David Gordon

데이비드 고든은 루트비히 폰 미제스 연구소의 선임 연구위원이다.


Sooyoun Hwang (황수연) is a former professor of public choice at Kyumgsung University, Bu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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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 랜드(Ayn Rand)의 정치 철학

04/24/2019David Gordon

[Translated by Sooyoung Hwang (황수연)]

≪자유 사회의 기초: 아인 랜드의 정치 철학에 대한 성찰(Foundations of a Free Society: Reflections on Ayn Rand's Political Philosophy)≫, 그레고리 살미에리(Gregory Salmieri) 및 로버트 메이휴(Robert Mayhew) 엮음, 피츠버그 대학교 출판부, 2019, xi + 460페이지.1

이 탁월한 책은 기고자들의 선택에서 아인 랜드(Ayn Rand)와 리버테리어니즘(libertarianism) 사이의 기묘한 관계를 반영한다. 한편, 사회의 정치적 조직에 대한 그녀 자신의 제안들은 최소 국가 리버테리어니즘(minimal state libertarianism)의 한 견해이고 그녀의 소설들과 에세이들은 많은 리버테리언들(libertarians)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다른 한편, 그녀는 자기가 리버테리언이라는 점을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리버테리어니즘을 과연 그녀답게 격렬한 방식으로 매도했다. 특히 머리 로스버드(Murray Rothbard)의 무정부주의 입장이 그녀의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이 책의 많은 기고자들은 “공식적인(official)” 객관주의 철학자 조직, 아인 랜드 학회(Ayn Rand Society)의 회원들이지만, 맷 즈월린스키(Matt Zwolinski), 피터 뵛키(Peter Boettke), 그리고 마이클 휴머(Michael Huemer)를 포함하는 다른 사람들은 객관주의자들(Objectivists)이 아니다. “공식적인” 객관주의자들은 랜드 자신보다 더 많이 그녀의 정치사상과 리버테리어니즘 사이의 유사성을 인정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녀처럼, 그들도 리버테리어니즘을 비판하고 로스버드의 무정부주의를 매도한다.

아래에서, 나는 로스버드의 무정부주의(anarchism)에 대한 비판들을 역점을 두어 다룰 것인데, 이것들이 mises.org의 독자들에게 아주 흥미로울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것에 착수하기 전에, 나는 객관주의자들이 제기하는 리버테리어니즘에 대한 더욱 일반적인 비판을 검토하고 싶은데, 이것이 상당한 철학적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랜드의 정치적 제안들과 최소 국가 리버테리어니즘 사이의 명백한 유사성을 고려할 때, 객관주의자들이 리버테리어니즘에 대해 왜 그렇게 비판적인가? 누구든지 그들에게 질문할 유혹을 느끼기를, “좋다, 당신이 무정부주의를 좋아하지 않지만, 과세 권력 없는 최소 국가와 자유방임 자본주의에 대한 지지가 당신에게 왜 충분하지 않나? 당신은 무엇을 더 원하나?” 그들의 대답은 비(非)객관주의 리버테리어니즘이 적절한 철학적 기초들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기초들이 없으면, 리버테리언들은 자기들의 정치적 결론들을 충분히 지탱할 수 없다면서.

하나의 예로서, 하비 머드 대학(Harvey Mudd College)의 철학 교수이자 객관주의 철학자들 사이에서 떠오르는 스타인 대릴 라이트(Darryl Wright)는 로스버드가 자기의 불가침 원칙(non-aggression principle)을 규범적 윤리학(normative ethics)에 입각시키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비록 로스버드가 자연법의 윤리를 받아들였다 할지라도, 그는 또한 정치 철학이 자율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는데, 이것이 그의 치명적 실수였다는 것이다. “로스버드의 침해 관념의 난관의 원천은 . . . 자기 소유를 이해하는 특정한 방식에 있는데, 이것은 그 다음에는 내가 정치 철학의 자율성(autonomy of political philosophy)이라고 부를 것에 대한 로스버드의 헌신에서 생긴다. 이 말로 나는 정치 철학이 규범적 윤리학과 독립적이어야―즉, 자기 생애의 전체에 적용될 수 있는 어떠한 실체적 윤리 이론과도 독립적이어야―한다는 견해를 의미한다.”(p. 107) 더욱 일반적으로, 라이트가 말하기를, “철학에 대한 랜드의 접근법이 전체론적(holistic)이기 때문에, 폭력의 비(非)개시 원칙(non-initiation of force principle)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윤리학과 인식론에 대한 그녀의 더욱 근본적인 입장들에서 생기는지 알 필요가 있다. . . .” (p. 16)

레너드 페이코프와 더불어 아인 랜드 학회의 가장 고참 철학자인 해리 빈스방거(Harry Binswanger)도 역시 마이클 휴머에 대한 응답에서 기초들의 필요를 강조한다. “랜드는 리버테리언들이 폭력의 비개시 원칙을 마치 그것이 공리인 것처럼 취급한다고 반복해서 비판했는데, 그것이 완전한 철학적 기초를 필요로 하는 아주 파생적인 원칙이라고 말했다.” (p. 273)

적절한 윤리적 기초들은 무엇인가? 여기에서 객관주의자들은 인간들이 생존하기 위해 이성(reason)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반론의 여지가 없는 진실로부터 시작한다. 동물들은 본능을 통해 생존하지만, 인간들에 대해서는, 라이트가 말하듯이, “기능(functioning)은 우리의 유전적 특질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 . . 우리는 [동물들의 그것에] 상당하는 상태를, 우리의 삶이 자기의 전 생애에 걸쳐 필요로 하는 기본적인 종류의 인지 및 존재의 행동들을 승낙할 수 있는 상태를, 우리 자신 안에―우리의 영혼 안에―창출해야 한다.” (p. 18) (내가 이 진실이 반론 불가능하다고 말할 때, 나는 객관주의자들이 윤리 이론에서 그것을 사용하는 용법을 보증할 생각이 아니다. 그것은 반론의 여지가 결코 없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생존하는 데 이성을 필요로 하지만, 이성(reason)이란 무엇인가? 여기에 랜드의 개념 형성의 이론(theory of concept formation)이 표면화한다. 우리는 전(前)개념적 지각(知覺) 상태들(preconceptual perceptual states)로부터 “측정 생략(measurement omission)”을 통해 개념들을 추상한다. 이런 개념들로부터, 추가적인 추상들이 일어나고, 이 과정은 계속되어, 개념들의 계층제를 창설한다. 그 계층제가 아무리 높이 자라더라도, 그것은 지각의 대상들로부터 추상된 첫 수준 개념들에 의거하고 있다.

나는 여기서 이러한 개념 설명을 반론할 생각이 아니지만, 객관주의자들이 많이 강조하는 이론의 두 용도가 그것에서 나오지는 않는다. 마음이 랜드가 암시하는 바로 그 방식으로 개념들을 얻는다는 것이 옳다고 가정하자. 우리가 계층제적인 개념 형성의 이러한 과정을 의식적으로 제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이상의 단계이고, 내게는 지탱되지 않는 것 같은 단계이다. 즉, 객관주의자들은 우리가 우리의 개념들을 그것들의 지각적 기초로까지 거슬러 올라가 기원을 찾아야 한다는 것과, 계층제의 매 단계에서, 우리가 그 단계에서 추상된 개념의 명백한 정의를 제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추상의 과정은 그것이 의식적인 지시 없이 진행될 때 더 잘 작동할 것이다.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주장은 정확하게 무엇인가? 개념 형성을 의식적으로 제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잘 생존할 수 있는가? 그것은 조사할 여지가 있는 문제인 것 같고, 나는 사정이 이러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어떤 연구들도 알지 못한다. 쟁점이 되고 있는 것을 또렷하게 하면, 내가 제기하는 질문은 합리적인 사람들이 불합리한 사람들보다 더 생존할 것 같은지 여부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개념들을 그것들의 지각에의 의거까지 의식적으로 추적하는 것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 더 합리적이라는 것을 합리성이 필요로 하는지, 혹은 심지어 암시하기라도 하는지, 여부이다. 이의를 예상해서, 조사의 필요를 말할 때 나는 레너드 페이코프가 유명한 에세이에서 문제 삼은 분석적-종합적 양분(analytic-synthetic dichotomy)의 진실성을 가정하고 있지 않다. 나는 좁은 의미에서 “분석적(analytic)”이지 않은 모든 진실들이 우연적(contingent)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이성에 관한 특정 주장이, 필연적으로 진실인지 여부는 말할 것도 없고, 진실인지 여부를 의문시한다. 객관주의자들은 우리가 생존하는 데 이성을 필요로 한다는 명백하게 진실한 주장에서 우리의 이성을 특정한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생존을 돕는다는 지탱되지 않는 주장으로 무비판적으로 이동했다.

내게는 의심스러워 보이는, 객관주의자들이 한 또 하나의 주장이 있다. 그들은 적합한 지식 계층제(hierarchy of knowledge)를 강조하는데, 여기서는 누구든지 개념들의 이론을 가지고 시작해서, 윤리학을 세우는 데 사용하고, 그 다음에 후자는 정치 철학을 세운다. 개념들의 이론은 이 견해에 의거하여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 있다. 그 계층제가 이의 없이 역사적 인과 이론(theory of historical causation)으로 변형될지 모른다는 점이 이것에서 나오지는 않는데, 그 이론에 따르면 이롭거나 해로운 정치 학설들이 궁극적으로는 그것들의 옹호자들이 신봉하는 개념들의 이론에서 생긴다. 이러한 인과 이론은 페이코프 박사의 잘 알려져 있는 책 ≪불길한 평행선(The Ominous Parallels)≫에서 나치즘의 설명에 기본적인데, 이것은 내 의견으로는 자기의 주장이 정당함을 입증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책이다.2

로스버드의 무정부주의에 대한 비판들에 이르기 전에, 랜드의 철학에 관한 하나의 추가적인 주장을 밝히고 싶다. 객관주의자들은 가치의 개념이 생명(life)에서 생긴다고 주장한다. 객관주의 가치 설명이 경쟁적인 가치 이론들보다 더 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가치의 개념에 대한 유일한 기초라는 것이다. 빈스방거 박사가 진술하듯이, “본질적인 점은 이것이다. 오직 생명만이 가치와 반(反)가치, 혹은 선과 악 사이에 객관적이고 비자의적인 구별을 가능하게 한다. . . .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창출하는 것은 행동에 대한 생명의 조건부(conditionality)이다.” (p. 265, 강조는 원전의 것)

그것은 가치의 개념이 획득되는 방식에 관해 가능한 이야기이지만, 나는 그것이 그것 이상이 되는 이유를 알 수 없다. (다시, 이 이의를 제기할 때, 나는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이성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고 나는 개념 획득에 관한 랜드의 설명에 도전하지 않는다.) 다른 가치 이론들의 옹호자들이―물론 객관주의자들의 정의와 다른 가치 정의를 사용하여―가치의 개념이 획득되는 방식에 관해 자기들 자신의 이론들을 제안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명이 행동에 조건적이지만, 이것이 가치의 개념이 획득되어야 하는(must) 방식에 관한 설명을 정확하게 어떻게 발생시키는가? 이 특별한 가치 관념이 왜 유일한(the) 가치 개념이 되는가?

이제 로스버드의 무정부주의에 대한 비판들을 조사하자. 대체로, 이 비판들은 로스버드의 입장의 오해에 의거한다. 예를 들면, 빈스방거 박사는, 무정부-자본주의(anarcho-capitalist) 견해에 의하면, 사람들이 자기들의 재량으로 폭력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그는 이것을 랜드의 입장과 대비하는데, 여기서는 폭력의 사용이 객관적으로 진실한 표준들에 근거하고 있다. “정부와 ‘경쟁하는 것(competing)’을 정당화하는 개인 권리들을 행사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현실에서 의미할 것을 구체화하려는 첫 시도에서 무너진다. 기관 단총들을 거총 자세로 하여 중심가로 행진하는 한 무리의 낯선 사람들을 그려보자. 경찰과 마주 대했을 때, 그 무리의 지도자는 선언한다. ‘나와 부하들은 그저 정의를 행하도록 여기 있을 뿐이고, 그래서 당신들은 우리를 방해할 권리가 없다.’ ‘리버테리언 무정부주의자들’에 따르면, 그런 대면에서 경찰은, 자위와 자유로운 거래의 권리들을 어기는 것을 각오하고, 도덕적으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p. 229)

이것에 반대하여, 빈스방거 박사는 말하기를, “물론, 사실상, 개인 권리들과 사적 폭력을 불법화하는 것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자의적인 폭력 사용에는 권리가 없다. 어떤 정치적 혹은 도덕적 원칙도 다른 사람들이 폭력을 자의적으로―즉, 그들이 우연히 신봉하는 무슨 사적인 정의 관념들이건 그것들에 따라서―사용하는 동안 경찰에게 무력하게 방관하라고 요구할 수 없을 것이다.” (p. 229)

이 이의는 로스버드의 입장과 관련이 없다. 그도 역시, 의견을 서로에게 양보하거나 “끝까지 싸우는(fighting it out),” 대립되는 의견들을 가진 기관들에게가 아니라, 대개 관습법의 전통에 근거한 객관적인 법 규범(law code)을 믿었다. 브루노 레오니(Bruno Leoni)의 ≪자유와 법(Freedom and the Law)≫의 서평에서, 그가 말하기를, “요컨대, 행정 명령이나 제정 법률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심지어 판례법에 대한 대안이기도 한, 사회의 법을 위한 또 하나의(another) 대안이 존재한다. 그 대안은 리버테리언 법(libertarian law)인데, 폭력은 오직 폭력을 개시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만 사용되어도 좋다는 기준에 근거해 있고, 그러므로 폭력에 의한 ‘침해(invasion)’로부터의 모든 개인의 인명과 재산의 불가침성에 근거해 있다. 실제로, 이것은 대체로 리버테리언 관습법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을 인간의 이성을 사용하여 수정해서, 드디어 그것을 영구적으로 고정된 리버테리언 규범이나 헌법으로서 소중히 간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 리버테리언 법 규범이 민간 경쟁 법원들의 전문가들과 법관들에 의해 끊임없이 해석되고 적용되는 것을 의미한다.” “법률 없는 법을 가지는 방법(How To Have Law Without Legislation)”에서.

무정부-자본주의에 대한 또 하나의 이의도 역시 실패한다. 빈스방거 박사는 놀랄 만한 주장을 개진한다. “궁극적으로, 독점 정부를 반대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은 결국 평화주의자(pacifists)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모든 폭력이 독점적이기 때문이다. . . . 반대자들이 제 마음대로 하게 하는 폭력과 같은 것은 없다. 폭력은 ‘각자 취향이 다른 것(to each his own)’을 참지 않는다. 폭력은 바로 다른 사람의 의지를 자기 자신의 의지에 예속시키려는 시도이다. 만약 자위 수단의 폭력이 정당화된다면, 이것은 상호 작용을 독점화하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내가 침해자에 대해 나 자신을 방어하는 데 폭력을 사용한다면 나는 그를 설득하려고 하고 있지 않다―나는 그가 자기가 선택하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시도하려고 하고 있다. 만약 폭력의 정부 독점이 잘못이라면, 개인들에 의한 폭력의 사적 사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따라서 정부의 폭력 독점의 반대 논거는 자위 수단의 반대 논거이고, 그것은 평화주의(pacifism)에 이른다.” (p. 278)

이 이의는 나를 당황하게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로스버드와 랜드의 최소 국가 지지자들 사이의 논쟁과 관련 없기 때문이다. 침해자에 대항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 설득과 모순되느냐 여부는 의미 있는 주제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쟁점이 되는 질문은 객관적인 법이 국가를 필요로 하느냐 여부이다. 설사 빈스방거 박사가 설득과 침해자에 관해 옳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이 모음집에 있는 모든 에세이들은 면밀하게 연구할 가치가 있다. 나는 특히 레스터 헌트(Lester Hunt)가 “권리들에 관한 아인 랜드와 로버트 노직의 견해(Ayn Rand and Robert Nozick on Rights)”에서 권리들을 부차적 제약(side payments)으로서 탁월하게 분석한 것을 감탄한다.

아인 랜드는 중요한 사상가였지만, 그녀가 항상 옳지는 않았다.

 


글쓴이) David Gordon

데이비드 고든은 루트비히 폰 미제스 연구소의 선임 연구위원이자, ≪미제스 리뷰(The Mises Review)≫의 편집장이다.


Sooyoun Hwang is a former professor of public choice at Kyungsung University, Busa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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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 책 한 권을 보내 주시고 비평하도록 요구하신 닐 퍼라일리(Neil Parille)씨에게 감사한다.
  • 2. 나는 개인적 주(註)가 내게 허용되기를 희망한다. 아주 옛날 1982년에 ≪탐구(Inquiry)≫에 쓴, 그 책에 관한 나의 서평은 나의 모든 서평들 가운데서 두 번째로 많이 비판을 받았다. 내가 가장 많이 비판 받은 서평은 프란스 할스(Frans Hals)의 어느 유명한 그림의 찬미자가 쓴 책에 관한 것이었다.

‘맨큐경제학’의 맨큐는 연준과 ... 노동가치설을 사랑한다

[Translated by Jinyoung Bae (배진영)]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경제학 교과서로 대성공을 거둔 맨큐(N. Gregory Mankiw)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1:

"나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연방준비(Federal Reserve, 역주: 미국의 중앙은행으로 간단히 ‘Fed, 연준’이라 함)를 사랑한다. 다른 대부분의 경제학자들도 마음속으로 연준을 사랑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맨큐는 자신의 연준에 대한 진한 사랑을 왜 이처럼 밝혔을까? 연준이 미국 경제에 가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일까? 그러나 맨큐의 아래와 같은 대답 속에는 이처럼 아주 중요한 질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지 않고 있다:

"미국의 중앙은행은 약 20,000명의 미국인들을 고용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경제를 감시하고, 통화정책 수립에 도움을 주기 위해 경제 분석을 하며, 금융시스템을 조율한다. 누구도 민간은행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대단한 월급을 받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엄격하고 고집스럽게 그리고 어떤 스캔들도 일으키지 않으면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그들이 맡은 소임을 잘 수행한다."

금융위기를 심화시킨 “자책(unforced error)”을 인정함에도, 그 실수조차 “중앙은행에 대한 [맨큐의] 사랑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사람들에 대해서 “완벽함의 기준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 점수를 매긴다면, 맨큐는 연준에 “최고 등급”을 준다. (역주: 맨큐는) “공공기관”으로서의 연준 성공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인에서 찾고 있다. 첫째, 연준의 목표는 나라에 보다 안전하고 보다 유연하며 보다 안정적인 화폐시스템과 금융시스템을 갖추게 하는 것이다. 내가 “목표”라는 단어를 강조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라. 맨큐는 “대체로 (역주: 목표) 성취에 성공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실제 결과를 성취했는지의 여부보다 과시적인 목표를 추구하는데 최대한 노력을 했는지가 맨큐가 연준을 평가하는 첫 번째 기준인 것처럼 보인다. 그의 두 번째 성공 요인에서 맨큐가 연준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분명해진다.

"연준 성공의 두 번째 요인은 연준에 자신의 삶을 바치고자 하는 능력 있는 사람들이다. 연준은 매년 새로운 연구조원들을 최고의 대학교로부터 채용하고 있으며 새로운 직원의 경제학자들을 최고의 경제학박사로부터 뽑고 있다. 수년간에 걸쳐 나는 연준에 들어 온 많은 훌륭한 학생들을 알게 되었다. 경제정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보다 더 좋은 근무처는 없다."

그런데, 이처럼 사랑하는 당신의 공공기관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 리카르도(David Ricardo)의 낡은 노동가치설에 호소할 것인가?


글쓴이) Joseph T. Salerno

죠세프 살레르노는 Pace University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미제스연구소의 선임학자이고 Quarterly Journal of Austrian Economics의 편집위원이다.


Jinyoung Bae is professor of economics at Inje University,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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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르담 화재와 우리가 잃은 것

04/16/2019Jeff Deist

[Translated by Jinyoung Bae (배진영 역)]

노트르담(Notre Dame) 사원의 끔직한 화재는 수세기에 걸쳐 축적된 “문화자본”이 한 순간에 파괴될 수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12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지붕과 첨탑의 오크나무 목재는 영원히 사라졌다. 값을 매길 수 없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들 일부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흔히 말해지듯이, 프랑스는 서구의 심장이고, 파리는 프랑스의 심장이며, 노트르담은 파리의 심장이다. 이처럼 상징적인 교회가 불길에 휩싸인 광경은 그 자체로서 서구의 쇠퇴를 보여주는 표징이 아닌지 불안하게 한다.

여기에서의 “문화자본”은 금융자산이나 생산요소로서의 자본이라는 경제적 정의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 라스바드(Murray N. Rothbard)는 자본을 “세세하게 서로 얽혀있는 복잡한 자본재의 구조”로 정의했다. 이질적인 생산재로서의 자본이라는 라스바드의 정의와 같은 오스트리안의 폭넓은 관점조차 한 사회의 모든 부(富)를 포착해낼 수 없다. 자본은 궁극적으로 측정될 수 있고 개별 단위들로 환원될 수 있다. 그러나 세계 도처에 있는 가톨릭 교인들에게 노트르담의 가치는 측정될 수 없다. 그래서 순수한 경제학 용어로 그것의 손상 또는 파괴의 비용을 계량화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엄청난 손실이라는 사실은 다 안다. 그 아름다운 노트르담의 지붕과 첨탑에 담겨있는 수백 년에 걸친 부(富)는 이제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다.

블로거 Bionic Mosquito1는 문명화된(civilizational) 부(富)는 시간을 거치면서 중첩되어 가기 때문에 부는 물질적이고, 문화적이며, 정신적이고 심지어 문명적이기까지 함을 일깨워 준다.

... 부(富)는 단지 대차대조표 상에 나타나 있는 것만이 아니다. 문화, 축적된 지혜와 지식, 시간의 압축이라는 관점에서 부를 바라보아야 한다.

축적과 시간이 핵심이다. 건강한 사회는 부를 쌓고 이를 보존한다. 즉, 건강한 사회는 소비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창출하려는 개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단순한 풀리(pulley, 밧줄과 도르래로 된 장치)와 발판을 사용하면서 200년 넘게 노트르담을 지은 사람들은 그들 작품의 최종적인 결과를 볼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사실 어떤 교황도, 어떤 건축가도, 어떤 금융가도, 어떤 석공도, 어떤 예술가도, 어떤 노동자도, 또는 어떤 프랑스 군주도 이 사업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미래 세대들에게 오래 지속되는 그 무엇을, 돈으로는 도저히 환산할 수 없는 좋은 그 무엇을 지었다. 그들은 그들의 삶보다 훨씬 넘어서서 오래 가는 부를 건설했다.

건강한 사회라면 그 어떤 사회도 이런 일을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넘어서는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 본성이다. 사회를 형성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에 내재화 되어 있으며, 가장 야심찬 인간은 언제나 영원한 삶의 기념물이나 양식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즐기지 못할 미래를 위해 일하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것은 특히 수명이 짧고 힘든 삶을 살았던 우리 고대 선조들에게 사실이었다. 그들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필요한 자양물(滋養物)을 생산해야만 하는 대신 오래 지속되는 형태의 자양물로서, 음식, 물, 의복, 거처를 얼마나 많이 원했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사실 이 특성이야말로 아마 어떤 다른 것보다도 문명의 특징이다. 우리는 이를 여러 가지 형태로 지칭할 수 있지만, 우리는 이를 단지 다음과 같은 말로 대신할 수 있다. 건강한 사회는 자본을 창출한다고. 그들은 그들이 생산한 것보다 적게 소비한다. 이러한 자본축적이 투자와 생산성을 증가시키는 상향나선(upward spiral) 형태의 효과를 내면서, 미래를 더욱 밝고 풍요롭게 만든다. 자본축적은 인류가 생계의 비참함을 극복하게 해주었고, 농업혁명, 산업혁명, 그리고 디지털혁명을 가능하게 했다.

기술적인 노하우(know-how), 예술성, 장인정신도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는 부의 형태이며 그리고 지금까지 분명히 그러해왔다. 그런데 아래 글[2]은 노트르담이 정말로 전과 아주 같은 방식으로 다시 지을 수 있을지 의문을 던진다:

건축가는 기술적으로 아주 섬세하게 다시 짓기 위해 대성당에 관한 충분히 자세한 정보를 갖고 있지만, 장인정신은 꼭 그렇지 않다. 오늘날, 대성당을 구성하는 돌은 기계를 사용하여 깎을 수 있지만 오늘날의 석공들이 손으로 12세기의 석공들처럼 깎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머레이(역주: Stephan Murray, 컬럼비아 대학교 예술 역사가)는 Ars Technica(역주: https://arstechnica.com)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세기와 20세기 고딕 건물들은 항상 조금은 죽은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돌이 석공의 손과(역주: 석공의 손이 빚어낸 것과) 동일한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2

문명은 경제학 그 자체보다 훨씬 그 이상의 것이지만, 그것은 경제학을 필요로 한다. 미제스(Ludwig von Mises)는 ”민족들이 경제적 사고를 거부하는 교리에 계속 따를 경우, 그 문명은 멸망할 것이고 분명히 멸망한다“라고 우리에게 경고한다. 그래서 노트르담 화재의 그 슬픈 광경을 떠올릴 때, 우리는 우리 시대의 정치학과 경제학이 미래 세대를 위해 부(富)를 쌓는데 용기를 주는지 아니면 용기를 잃게 하는지를 자문해보아야 한다. 오늘날 서구 국가들의 유산을 물질적인 복지로만 쳐다볼지라도, 우리를 풍요롭게 하는 것을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분명히 우리 모두의 관심사이다. 재정 및 금융 정책의 수요견인 열광자들과 더불어, 단기(短期)의 정치적 사고는 노트르담 지붕을 태워버린 화마와 똑같이 우리의 미래를 집어삼킬 수 있다.


글쓴이) Jeff Deist

제프 다이스트는 미제스 연구소의 회장이다. 그는 전에 하원 의원 론 폴(Ron Paul)의 수석 보좌관으로서 그리고 사모(私募) 투자 펀드 고객들의 변호사로서 일했다.


Jingyoung Bae is professor of economics at Inje University, Korea. [옮긴이) 배진영(인제대 국제경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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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통계, 나쁜 통계

04/12/2019Gary Galles

[Translated by Yisok Kim (김이석 역)]

어떤 이가 공공정책을 왜곡해 당신에게 엉터리로 제시하려고 한다고 해보자. 그는 어떻게 가장 효과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누가 그런 시도에 저항하도록 당신을 도울 수 있을까?

누군가 특정 공공정책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려한다는 가설은 확실히 믿을만하다. (미국의) 두 주요 정당들은 거의 모든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것 같고, 당내에도 여러 노선들이 있으며, 법과 규정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만들려는 이해관계자들이 우글거린다. 거기에다 언론은 파당적 스캔들과 논쟁거리를 찾기 위해 이런 것들을 마구 휘저어놓는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정책에 대한 왜곡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사실, 거의 모든 이슈에 대해, 대다수 집단들은 아니더라도 일부 집단은 그들의 이해관계를 증진시키려는 유혹에 빠진다. 이들이 쓰는 기술의 범위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기”에서부터 완전히 대놓고 거짓말하기까지 상당히 넓을 것이다.

세상에는 거의 완전한 거짓말에 가까운 일상화된 정치적 트릭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미네소타 입법부가 최근 〈전국대중투표제〉(National Popular Vote)의 제정 과정에서 몰래 집어넣기 시도를 했듯이, 종이 눈사태처럼 무수한 일괄 법안들 속에 바람직한 변화들이 (역주: 실현되지 못한 채) 파묻혀버릴 수도 있다.

또는 당신이 다뤄야할 문제지만 그 문제에 대한 책임은 딴 사람에게 돌리는 애매한 법안을 만들어 통과시킬 수도 있다. 그런 법안이 실무적으로는 집행 기관과 법원에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역주: 아무런 법안을 통과시키지 않은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속임수는 내가 이 글에서 관심을 두는 게 아니다.

나가 묻고자 하는 것은 그런 정치적 위장의 뒤쪽이 아니라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사물을 왜곡하는 방식이다. 나의 공공​​정책 수업을 듣는 학생에게 경고했듯이 일반적인 원칙은 당신의 가장 취약한 분야에서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미국인이라면 그런 취약점 가운데 하나가 전형적으로 수학, 특히 통계다. 그래서 거짓말(lies)과 사악한 거짓말(damned lies)과 함께 수학과 통계학이 불명예를 뒤집어쓴다.1 그래서 허프(Darrell Huff)의 《통계를 동원한 거짓말》(How to Lie with Statistics)에 실린 ‘엉터리 통계를 악용하는 속임수들’은 출판된 지 65년이 지난 그 책을 계속 판매되게 하고 있다.

그러나 널리 퍼진 무지(無知)는 통계학 자체보다 더 깊다. 극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시된 데이터가 실제로 무엇을 측정하는지, 어떤 가정들 아래 측정되고 또 어떤 한계점들이 있는지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 결과 통계가 부주의하고 무책임하게 사용된다. 예를 들어, 고용률과 실업률이 동시에 상승할 수 있는 이유를 분명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2 두 지표의 이름들은 두 지표의 동시 상승이 가능하지 않을 것처럼 지어져 있지만, 사람들이 이를 쉽게 설명할 수 있어야 비로소 그 통계들이 믿을 만한 경제지표가 될 수 있다.

토마스 소웰(Thomas Sowell)[1]은 가장 최근의 저서 《차별과 격차》(Discrimination and Disparities)에서 이 문제를 "분석의 기반인 숫자들이 측정하려는 것을 실제로 측정하는지 아니면 측정한다고 주장될 뿐인지, 이런 간단하고 근본적인 의문을 간과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허위 진술로부터 우리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수준에서보다 면밀한 조사”를 해야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조심스럽고 근본적인 조사를 하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이런 기초적인 일을 해내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 오류에 빠질 가능성에 대비하여 들 수 있는 가치 있는 “보험”을 제공한다. 흔히 제공되지 않는 이런 분야에서 보험 제공의 수고를 다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그들의 노고에 대한 우리의 감사를 받을 만하다. 나는 특히 내게 도움이 된 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토마스 소웰은 수십 년 동안 다작의 저술을 통해 명확한 설명을 다수 제공해준 저자다. 예를 들어, 그의 공통된 주제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은 구별이었다. 즉, (구성원들이 변화하지만 일정한 특성을 유지하는[역자삽입]) 안정된 집단으로 해석되는 특정 집단(예컨대 “부유층” 또는 “빈곤층”)의 구성원에게 일어나는 것과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런 분류들에서 벗어나) 다른 집단으로 이동하는 실제 사람들이 겪는 매우 다른 경험들을 구별할 필요였다. 이런 구별은 집단에 기초한 분석들이 내린 결론을 뒤집어엎는다.3

차별과 격차》는 그의 초기 저술들로부터 그가 다루던 주제를 다룬다. 그가 다룬 것들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카드(Card)와 크루거(Krueger)의 최저 임금 조사에 대한 그의 논의다. 카드와 크루거는 최저임금 인상으로 실업이 증가한다는 (경제학의) 결론을 뒤집은 것으로 유명해졌는데 소웰은 그들의 결론을 재검토했다. 그들의 연구는 최저임금 인상 전후의 고용 변화를 알아보려고 동일한 고용주를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생존자들만을 대상으로 설문조사가 가능하다”는 데 있다. 사업의 중단으로 사라진 일자리들은 설문조사에 포함될 수 없다. 그래서 설문조사를 실시한 생존자들이 고용을 줄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조사방법으로는 보이지 않는 많은 일자리가 여전히 사라졌을 수 있다.

상황을 더 확실하게 그려볼 수 있도록 그는 러시안 룰렛을 예로 든다. 러시안 룰렛을 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러시안 룰렛 시행 전후의 상황에 대해 동일한 방식으로 설문조사를 했다면 아무도 해를 입지 않았다고 했을 것이다. 그는 또한 조지 스티글러(George Stigler)의 다음과 같은 신랄한 조롱도 인용한다. 1940년과 1946년 미국의 퇴역군인들에 그런 설문조사를 했다면, 아마도 그 조사는 “전쟁 중 사망한 병사는 없다”는 것을 “증명”했을 것이다!

이런 통계적인 불법행위를 고발하는 많은 글을 쓴 또 한 명의 감시자는 마크 페리(Mark J. Perry)[2] 다. 그는 다양한 매체들을 통해 여러 번 잘못을 지적하는 매우 유용한 “붉은 깃발들”을 들어서 경고해왔다. 그의 지적이 주는 하루-최고의 즐거움을 내가 손꼽아 기다릴 정도다. 좋은 사례가 “동일임금일”(Equal Pay Day) 주장에 대한 그의 “문제점 콕 집어내기”다.[3] 동일임금일 주장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의 연간 (중간) 소득의 차이를 “남성과 동일한 일을 하는” 여성에 대한 부당한 차별 때문이다.

그는 동일임금일 주장에 사용된 데이터가 “근로 시간, 결혼 여부, 자녀 수, 교육, 직업, 지속적인 중단 없는 직업 경험 년수, 근로 조건, 작업장 안전, 직장 유연성, 직장의 가족 친화력, 직업 안정성 및 통학 시간” 등의 차이를 조정하지 않은 채 사용됐다고 지적한다. 앞에서 열거한 요인들은 남성들에게 평균적으로 더 많이 지불케 한다.

앤드류 빅스(Andrew Biggs)[4]도 통계적 책임에 관한 한, 특히 퇴직연금과 퇴직플랜과 관련된 분야에서, 매우 깐깐한 또 한 명이다. 예를 들어, 최근 GAO4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55세 이상 미국 가구의 48%가 "저축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만 그는 〈포브스〉에 기고한 글에서[5] 전통적인 확정급여형 연금이 고려될 경우, 72%의 사람들이 그와 같은 저축 플랜을 가지고 있고, 또 가족 중 한 사람만이 퇴직 플랜을 가진 경우를 포함하면 결혼가구 중 83%가 퇴직 플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보고서가 현실과 동떨어진 것임을 보여주었다. 확정급여형 연금을 포함하고, 결혼 가구들 가운데 가구원 한 명이 퇴직 플랜을 가진 경우를 고려하는 등 두 가지 변화를 주기만 해도 결론이 완전히 뒤바뀐다! 그는 여타 편견들도 지적했다.

이 세 사람은 각각 나로 하여금 측정(measurement) 이슈를 종전에 비해 훨씬 잘 이해하도록 만들었고 그 결과 정책 이슈들에 대한 나의 분석을 훼손시켰을 오류들을 피하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그들에게 빚을 졌다. 독자들도 내가 이들로부터 받은 것과 유사한 “개인지도”에 관심을 갖게 될지 모른다. 이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의 노고가 나에게 유용했다. 그리고 특히 이런 유형의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풀이 아직 ​​너무나 얕기 때문에 어쩌면 내가 계속 배워나가면서 미래에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의 목소리를 외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여기에서 내가 주로 심각한 경종을 울리고 싶었던 것은 통계적 적용과 제시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無知)뿐만 아니라 정책적 결론에 이르면서 자주 벌어지는 데이터의 오용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다.


글쓴이) Gary Galles

개리 갤러스는 페퍼다인대학교(Pepperdine University) 경제학 교수이다. The Apostle of Peace: The Radical Mind of Leonard Read 등의 저술이 있다.


Yisok Kim is chief editorial writer for Asiatoday, Seoul, Korea 김이석(아시아투데이 논설심의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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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역주] “거짓말, 사악한 거짓말, 통계”(Lies, Damned Lied, and Statistics)는 숫자의 설득력, 특히 약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통계의 사용을 설명하는 문구이다. (위키피디어 인용)
  • 2. [역주] 고용률이란 15세 이상 생산가능인구 중 취업자가 차지하는 비율을 말한다. 실업률은 생산가능인구 가운데 일할 능력이 없거나 일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구직포기자, 학생 등을 뺀 경제활동인구 중에서 실업자가 차지하는 비율을 말한다. 고용률과 실업률의 합은 1이 아니다. 고용률과 실업률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고용률=경제활동참가율×(1-실업률). 실업률이 높아지더라도 경제활동참가율이 충분히 높아지면 고용률도 동시에 높아질 수 있다.
  • [1]. https://tsowell.com/
  • 3. [역주] 예를 들어 소웰에 따르면 “모든 미국인 가운데 절반은 그의 일생 가운데 일정 시점에서 그들의 소득이 ”소득상위 10%“에 든다. 23년간을 두고 보면, 약 4,600명 정도가 1년 정도 소득상위 400인 안에 든다.” 집단간 이동을 제외한 분석은 마치 400명만이 그런 소득상위에 속할 수 있고 나머지는 그렇지 못한 것 같은 ‘착시’를 일으킨다. 그런 착시 속 내린 결론도 왜곡되지 않을 수 없다.
  • [2]. https://www.aei.org/author/mark-j-perry/
  • [3]. https://www.aei.org/publication/for-equal-pay-day-evidence-of-employers-paying-women-20-less-than-men-for-the-same-work-is-as-elusiv
  • [4]. https://www.aei.org/author/andrewbiggs/
  • 4. [역주] GAO는 Government Accountability Office의 머리글자를 딴 미국의 국회소속 기관인데 과거에는 Government Accounting Office로 불렸고 회계검사원 혹은 회계감사원 번역됐지만 회계적 책임을 넘어서는 정부의 책임성(Accountability)을 강조하는 이름으로 변경됐다. 우리나라의 감사원 혹은 국회예산처에 상응하는 기구로 보면 된다. 
  • [5]. https://www.forbes.com/sites/andrewbiggs/2019/03/27/no-half-of-older-americans-arent-without-retirement-sav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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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경제학자들이 아직도 주관적 가치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03/14/2019Per Bylund

[Translated by Haeng-Bum Kim (김행범)]

주관적 가치란 객관적인 것이 아니다. 분명한 얘기로 보이지만, 대부분 사람들에게 그게 분별되지 못하고 있고 학자 및 실무자들에게도 그러하다.  

사람들은 주관적 가치를 단지 가격에 대한 어떤 개인의 지불의사(willingness to pay)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실은 그게 아니다. 주관적 가치란 화폐로 표현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주관적 가치는 시장에서의 구매력이라는 객관적 표준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가치가 주관적인 것이라면, 그 구매력 또한 그것이 (돈으로 구입할 수 있는 실제의 재화와 서비스를 통해) 어떤 주관적 가치를 줄 수 있는가에 따라 평가된다. 또, 시장 형태를 띤 모든 상황 속에서는, 어떤 재화에 대한 구매력을 포기한다는 의사는 그 구매력(그게 그/그녀에게 어떻게 평가되든 간에)이 그것으로 구입될 수 있는 재화에서 얻을 것으로 기대되는 가치보다 더 낮은 것으로 그가 주관적으로 평가했음을 보여줄 뿐이다. 

화폐로 표현되어 있고 나아가 재화와 서비스를 주관하는 ‘지불의사’는 단지 구매자가 그 거래를 통해 자신의 후생이 증가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가치 이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라지는 것의 가치와 그것으로 얻게 되는 가치 사이에는, 그것들이 달리 평가된다는 점(전자가 후자보다 높게 평가된다)을 제외하고는 어떤 관련성도 없을지 모른다. 

학자들이라면 이 점들을 혼동하지 않을 정도의 지각이 있어야 하지만 분명 그들은 아주 혼란에 빠져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대신에, 고객의 가치평가에 관한 화폐량을 구하는데 사용될 실제적인 간편 척도를 채택한다. 어느 재화에 대한 고객의 지불의사가 그 재화에 대해 얼마의 화폐가격이 잠재적으로 부과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략적인 추정치가 될 경우에는 이것은 실무자에게는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한 것은 아니며 바로 이 때문에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 모형들은 기업가들이 고객의 ‘선언된’(stated) 지불 의사(그 선언이 신빙성이 있다면)보다 낮은 가격을 책정하라고 제안하는 것이다. 

또한, 실제적인 지불의사는 고객이 그것을 소유/구입할 경우 왜 고객에게 가치가 있을 것인가에 대한 논거와 함께 재화를 실제적으로 제시하는 가에도 의존한다. 

장소와 시간 또 메시지가 다를 경우, 이러한 ‘의사’는 그 재화가 주관적으로 어떻게 평가되는가? 뿐 아니라 고객에게 주어진 다른 기회들이 있는가? 에도 좌우된다. 나는 햄버거가 가치 있다고 평가할지 모르지만, 핫도그에 더 많이 가치를 부여할지 모른다. 

그 결과, 핫도그가 존재할 경우 햄버거에 대한 나의 지불의사의 크기는 실질적으로 영(zero)이다; 만약 핫도그가 눈앞에 없다면 햄버거에 대한 나의 지불의사는 아주 클 수 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이해되는가?  

한 개인의 지불의사는 재화에 대한 (주관적) 평가(즉, 직접 경험해 본 만족이거나 혹은 어떤 식으로든 예측이 된 만족) 그 자체만이 아니라 이용 가능한 다른 대안들에도 의존하는 것이다.

주의력이 깊은 실무자들이라면 지불의사의 추정(역주: 예컨대, ‘미세먼지를 50% 줄이기 위해 얼마만큼 더 비용을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까?’ 라는 설문지를 통해 얻는 수치를 곧 청정대기라는 재화에 대한 지불의사의 크기로 추정하는 것)으로부터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매우 둔탁한 도구인데, 왜냐하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대안적’ 재화들에 대한 주관적 가치 평가(비교/대체)이기 때문이다. 

학자들이 주관적 가치평가와 객관적 화폐가격을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것은 학문적으로 매우 심각한 오류로 간주되어야 한다. 사물에 대해 면밀히 생각하는 직업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사물을 뒤죽박죽으로 섞어 버리는 것이 허용될 여지는 없다. 

혹은, 이 경우에서처럼, 주관적 가치를 객관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실수(실제로는, ‘해석’)를 하는 것도. 이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고 당신을 학문세계에 부적합한 사람이라고 판정 내려야 한다.


Per Bylund

 

퍼 바이런드 박사는 미주리 대학에서 응용경제학으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학교의 기업가정신 학부 Entrepreneurship & Records-Johnston Professor of Free Enterprise 조교수이다. 기업가 정신과 경영에 관해 글을 발표해 왔다.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깨닫지 못하는 것: 규제가 어떻게 우리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는 방식』, 『생산의 문제: 새 기업이론』을 저술한 바 있다.


Haeng-Bum Kim is professor of public choice at Pusan National University,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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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AI가 무슨 잘못인가? 국가가 문제이지

04/09/2018Per Bylund

[Translated by Jinyoung Bae]

그래서 저는 “당신은 이 컴퓨터를 신뢰합니까?(Do you trust this computer?)”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의 선과 악을 탐구하는 영화입니다. 선과 악을 다루고 있지만, 분명히 그 초점은 AI를 통제하지 않고 내버려 두면 그것이 초래할지 모르는 ‘TEOTWAWK(우리가 아는 바와 같은 세상의 종말)’에 맞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TEOTWAWK AI의 예가 ‘자율 무기(autonomous weapon)’와 ‘가짜 뉴스’라는 점입니다. 가짜 뉴스는 AI가 어떻게 소수의 지지를 받는 독재자가 정권을 장악할 길을 제공할 수 있는가 하는 이유 때문입니다. 저는 이 모두를 이해하고 심지어 두려워하지만, 이 예들 속에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AI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국가입니다. 국가를 장악하려는 국가의 군대와 그 집단만이 ‘살인 로봇(killer robots)’에 관심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살인 로봇은 이들 집단에/을 의해/위해 개발되고 있습니다. 가짜 뉴스와 ‘부당한 영향’ 문제 또한 국가 위의 권력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무기나 어떤 가짜 뉴스도 AI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영화는 이상하게 꼬아 그것을 AI의 문제로 만들고 있습니다. 더욱 나쁜 것은 영화가 AI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규제되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논리입니다. 국가가 문제의 공통 분모인데 그것이 동시에 해결자라니요? 그 대신 국가는 우리를 다음과 같이 믿게 합니다: 구글(Google)이 우리의 웹 검색을 추적하고 페이스북(Facebook)이 우리의 친구와 신념을 안다는 것이 문제다(“자동화 무기가 그러하기 때문에?”)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추한 것에는 나도 동의하지만, 어떤 기업도 삶과 죽음에 대해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실 기업은 가장 냉혹한 규제가 존재하는 곳에서 생산활동을 합니다. 그곳은 바로 시장입니다. 기업은 돈을 벌기 위해 투자를 합니다. 돈은 오직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법 중에 하나를 통해 획득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이 원하고 기꺼이 지불하고자 하는 것을 제공함으로써(오펜하이머(Oppenheimer)의 ‘경제적’ 수단) 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의지에 반해 그것을 빼앗음으로써(‘정치적’ 수단) 입니다. 기업은 전자에 따라 작동합니다. 그것은 기업이 소비자의 자비에 기댐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국가는 후자에 따라 작동합니다.

나는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가짜 정보’로 그들을 속이는 등 그런 능력에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 영화가 방 안에 있는 코끼리를 놓치고 있으면서 오히려 그것이 해결책이라고 제안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논리는, 이념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다면, 희망 어린 생각에 불과하며, 거기에 있는 것이 명백히 무엇인지를 알려고 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해결책은 단순히 해결책이 아닙니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이 데이터를 선별하고 사람들에게 그들이 듣고 싶은 것을 제공하기 위해 AI를 이용하는 방법을 국가가 규제한다면, 이것은 또한 미국 국방부(DOD: Department of Defense)) 또는 미국 국가안보국(NSA: National Security Agency)에도 그리고 이들이 소비자로부터 자발적으로 수집한 것이 아니라 비밀리에 수집한 데이터에도 적용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후자는 자율 무기에서 사용될 개연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 영화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심각히 다루고 있지는 않습니다.

정치적 수단과 오페하이머의 경제적 수단 간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 최근에 있었던 두 가지 신용 위기를 생각해보십시다. ‘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Cambridge Analytical)’의 붕괴로 인해 페이스북 주가가 급락했으며 이것이 주주들에게 수십억 달러의 손실을 입히게 되자, 페이스북은 즉시 사업 변경을 했습니다. 그 가치는 그 웹 사이트와 그것의 앱을 사용하여 계속 컨텐츠를 공유하기 위해 기꺼이 지불하고자 하는 것에 근거합니다. #페이스북삭제(#DeleteFacebook) 해시태그 운동이 주주들에게 해를 끼쳤습니다. 이것을 영화 스노우든(Snowden)에 의해 드러났던 것과 비교해 봅시다. 국가가 모든 사람들을 염탐하지 않나요? 기업들은 데이터를 부분적으로 수집합니다. 그 기업들은 이를 위해 요구되는 사항을 준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 그것에 관해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아야 할 책임을 강요 받고 있습니다. 물론 약간의 누수가 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흔들어 놓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은밀한 국가”의 감시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아마도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약간의 새로운 경로가 생긴 것을 제외하고는, 그리고 일어난 문제들을 통제하기 위해 더 많은 돈이 들어가는 것 말고는 말입니다.

어느 쪽이 더 문제가 많은가요? 소비자의 신용(정말로 변덕스럽지만)에 종속되는 ‘경제적’ 수단인가요, 아니면 통찰력과 감시에 구애 받지 않고 비밀스러운 데다 우리가 원하든지 말든지 간에 그 비용을 우리에게 떠넘기면서 전혀 책임도 지지 않는 ‘정치적’ 수단인가요?

‘정치적’ 수단이 어떻게 자율 무기와 동시에 국가 권력을 유지하고/요구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이 모두를 목표로 삼는지를 추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수단 중 그 어떤 것도 유토피아적인 완벽한 해결책이 아님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는 분명히 내장된 통제 메커니즘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것은 완전한 비밀 속에 행해지며 우리가 그 비용을 (비자발적으로) 지불해야 하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정치적’ 수단만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들의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에 기대고 있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학교에서 국가는 “우리 편”이라고 배워왔고 또 그렇게 믿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감시하고 자율 무기를 만드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사실, 자율 무기의 “개발 중단”이라는 정치적 결정이 내려질 것이라고는 쉽게 믿겨지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말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계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누가 정말로 믿겠습니까?

사실은 이렇습니다. 단순한 거짓말과 가장됨에는 내리막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심각하여 사람들이 어떤 기업을 신뢰하지 않게 되면 그 기업은 한 순간에 쓸려 없어질 수 있습니다. 그 기업의 가치는 날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논리는 현실에서 쉽게 작동되지 않으며, 그래서 그 영화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 지능(human intelligence)의 국가라면, 우리의 손에 들어 있는 데이터로부터 결론을 논리적으로 도출해내려는 우리의 능력을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 수준”에서 생각하는 기계를 만드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기계가 실제의 패턴을 인식하여 이로부터 결론을 도출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나는 영화 제작자들이 다음과 같이 경제학의 기초도 모른다고 해도 놀라지않을 것입니다: 자동화는 보다 적은 비용으로 우리에게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동화를 거대한 문제로 지적한다. 우리는 일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아! 안돼. 오늘 월요일 아침 이에 관해 생각해보세요. 

Jinyoung Bae is a professor of economics at Inje University, Korea. Mis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