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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에서의 가격 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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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8/2020Robert L. ScheuttingerEamonn F. Butler

[이 논문은 ≪40세기의 임금 및 가격 통제: 인플레이션과 싸우지 않는 방법(Forty Centuries of Wage and Price Controls: How Not to Fight Inflation)≫이라는 책, 제2장, “로마 공화국과 제국(The Roman Republic and Empire)”에서 발췌되었다.]

예상될지 모르듯이, 로마 공화국은 정부에 의한 경제 통제의 많은 모험들을 면할 수 없었다. 가장 유명한 로마 제정법들 중 하나는 12표법(Law of the Twelve Tables)(기원전 449년)이었는데, 이것은 무엇보다도 최고 이자율을 리브라(libra) 당 1언시아(uncia)(약 8퍼센트)에 고정했지만, 이것이 한 달 동안인지 일 년 동안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이 기본적인 법률이 통과된 후 여러 시점에서 정치가들은 채무자들에게 그들이 동의한 이자 지급액을 관대하게 탕감해 주는 것을 인기 있는 것으로 여겼다. 예를 들어, 기원전 367년의 리키니우스 법은 이미 지불한 이자가 빚진 원금에서 공제될 수 있다고 선언했는데, 요컨대 이자에 대해 0의 최고 가격을 설정하였다. 게누키우스 법(lex Genucia)(기원전 342년)도 비슷한 규정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는 이 “최고치(maximum)”의 위반들이 “마르키우스 법(lex Marcia) 아래에서 호되게 억압되”었다고 이야기 듣는다. 리비(Levy)는 “12표법을 제외하고, 이 임시의 혹은 선동적인 조치들이 이내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1)고 결론지었다.

곡물 법률들은 로마의 역사에 더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었다. 적어도 기원전 4세기 때부터, 로마 정부는 부족한 시절에 옥수수나 밀의 재고품들을 사서 그것들을 민중에게 낮은 고정된 가격에 다시 팔았다. 호민관 카이우스 그라쿠스(Caius Gracchus) 아래서 셈프로니우스 곡물법(Lex Sempronia Frumentaria)이 채택되었는데, 이것은 로마 시민에게 시장 가격보다 훨씬 더 낮은 공식적인 가격에 일정량의 밀을 살 권리를 허용하였다. 기원전 58년에 이 법은 모든 시민에게 무료 밀을 허용하도록 “향상되었다(improved).” 물론 그 결과는 정부에 예상 밖인 것으로 다가왔다. 시골에 머물던 대부분의 농부들이 일하지 않고 로마에 살기 위해 그저 떠날 뿐이었다.

노예들이 자기들의 주인들에 의해 해방되었는데, 그들이, 로마 시민으로서, 국가에 의해 부양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기원전 45년에,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는 거의 세 명 중 한 명의 시민이 자기의 밀을 정부 비용으로 받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간신히 이 숫자를 약 반만큼 줄였지만, 그것은 곧 다시 올랐다. 제국의 세기들 내내, 로마는 인위적으로 낮은 곡물 가격이라는 이러한 문제로 끊임없이 시달려야만 했는데, 이것은 온갖 종류의 경제적 혼란들을 야기했다.2)

자기들의 증가하는 경제 문제들을 처리하려고 시도하기 위해, 황제들은 점차 통화를 평가 절하하기 시작했다. 네로(서기 54-68년)는 소규모 평가 절하들로 시작했지만 주화들의 중량들이 감소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서기 161-180년) 치하에서 사정은 더 악화되었다. 리비에 따르면, “이러한 조작들은 가격들의 상승의 있음직한 원인이었다.” 코모두스 황제(서기 180-192년)는 다시 한 번 가격 통제들에 착수했고 일련의 최고 가격들을 포고했지만, 사정은 그저 더 악화되었을 뿐이고 가격들의 상승은 카라칼라 황제(서기 211-217년) 치하에서 “사납게(headlong)” 되었다.3)

이집트는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제국 속주(屬州)였지만, 그것의 경험은 더 적은 정도로지만 로마 세계 전체에 걸쳐서 반영되었다. 4세기 동안, 금 솔리두스(gold solidusㆍ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정한 로마 제국의 금화―옮긴이 주)의 가치는 4,000에서 1억8천 이집트 드라크마(단수는 drachma, 복수는 drachmai―옮긴이 주)로 변했다. 다시 리비는 뒤따른 가격들의 경이적인 상승의 탓을 유통 중인 화폐량의 큰 증가에 돌린다. 동일한 말(斗ㆍmeasure)의 밀의 가격은 이집트에서 첫 세기의 6드라크마에서 3세기의 200드라크마로 올랐다. 서기 314년에는, 그 가격은 9,000드라크마로 올랐고 서기 334년에는 78,000드라크마로 올랐다. 서기 344년 직후에는 그 가격은 2백만 드라크마 이상으로 급등했다. 언급되었듯이, 다른 속주들도, 설사 매우 극적이지는 않다 할지라도, 비슷한 인플레이션을 겪었다.4) 리비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화폐 문제들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그레샴의 법칙 그리고 다른 종류들의 화폐에 대한 국내 투기와 싸우기 위해 효과가 없는 규제들이 포고되었다. 주화들을 사거나 파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것들은 오직 지불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했다. 그것들을 퇴장(退藏)시키는 것조차도 금지되었다. (청동과 합금된 소량의 은을 추출하기 위해) 그것들을 녹이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 모든 위반들에 대한 처벌은 사형이었다. 도로들에 따라 그리고 항구들에서 통제들이 설정되었는데, 거기서는 치안대가 상인들과 여행자들의 몸을 수색했다. 물론, 이 모든 노력들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5)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칙령

가격들과 임금들을 통제하려는 가장 유명하고 가장 광범위한 시도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치세에서 일어났는데, 자기 신민들에 상당히 유감스럽게도, 그는 그리스 경제사의 가장 주의 깊은 학생이 아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통제하려고 한 인플레이션의 원인들과 그의 시도들의 효과들 양쪽 다가 꽤 잘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것은[그 인플레이션은] 약간 자세하게 고찰할 가치가 있는 삽화적(揷話的)인 사건이다.

그가 서기 284년에 제위를 장악한 직후, “모든 종류의 상품들의 가격들과 근로자들의 임금들이 선례가 없는 높이에 도달했다.” 이 놀랄 만한 인플레이션의 원인들을 결정할 역사적 기록들은 제한되어 있다. 몇 안 되는 잔존하는 그 당시의 출처들 중 하나인 ≪박해자들의 관습들에 관하여(De Moribus Persecutorum)≫의 제7장은 거의 모든 책임을 바로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씌운다. 그러나 그 저자가 기독교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그 중에서도 특히, 기독교도들을 박해했으므로, 우리는 이 보고서를 좀 에누리해서(cum grana salis) 받아들여야 한다. 황제에 대한 이 공격에서 우리는 제국의 대부분의 경제적 문제들이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막대한 군대 증가(이 기간 동안 이민족들에 의한 여러 번의 침입이 있었다), 그의 거대한 건설 프로그램(그는 자기가 선택한 소아시아 수도, 니코메디아(Nicomedia)의 많은 부분을 재건설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그의 세금 증가와 더욱더 많은 정부 관리들의 고용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의 공공사업 프로그램의 많은 부분을 달성하는 데서의 그의 강제 노동 사용 때문이라고 이야기 듣는다.6) 디오클레티아누스 자신은, (우리가 보게 되겠지만) 자기의 칙령에서, 인플레이션을 전적으로 상인들과 투기꾼들의 “탐욕(avarice)”의 탓으로 돌렸다.

고전 역사가 롤런드 켄트(Roland Kent)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법학 평론(University of Pennsylvania Law Review)≫에 쓰기를, 얻을 수 있는 증거로부터 가격들과 임금들의 가파른 상승의 몇 가지 주요 원인이 있었다고 결론짓는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이전 반세기에, 군대에 의해 승격되었던 일련의 짧은 치세의 무능한 통치자들이 있었다. 이러한 취약한 정부 시대는 내전들, 폭동들, 일반적인 불확실성 그리고, 물론, 경제적 불안정을 초래했다. 확실히 가파른 세금 상승이 있었는데, 그것의 일부는 제국의 방위를 위해 정당화될 수 있었지만 그것의 일부는 가치가 의심스러운 웅장한 공공사업들에 쓰였다. 그러나 세금이 오름에 따라, 조세 기반이 축소되었고, 세금을 걷는 것이 더욱더 어려워졌으며, 결과적으로 악순환이 야기되었다.7)

인플레이션의 주요 단일 원인이 주화의 평가 절하(devaluation) 혹은 가치 저하(debasement)에 기인한 화폐 공급의 급격한 증가라는 점은 명백한 것 같다. 공화국 말기와 제국 초기에, 표준적인 로마 주화는 은 데나리온(silver denarius)이었다. 그 주화의 가치는 점차 감소되어, 드디어 디오클레티아누스 이전 시대에는, 황제들은 여전히 “데나리온(denarius)”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주석 도금 동전들을 발행하고 있었다. 물론, 그레샴의 법칙이 작동되었다. 은 및 금 주화들은 자연적으로 퇴장(退藏)되었고 더 이상 유통되지 않았다.

서기 268년 클라우디우스 빅토리누스의 통치로 끝을 맺는 그 50년의 간격 동안, 로마 주화의 은 함유량은 자기의 원래의 수준의 5천 분의 1로 떨어졌다. 화폐 체제가 완전히 혼란해져, 제국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던 거래는 물물 교환으로 되돌아갔고, 경제 활동은 방해되었다.

중산 계급은 거의 절멸되었고 무산 계급은 빠르게 농노의 수준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지적으로 세계는 어떤 것도 자기를[세계를] 깨우지 못할 냉담(apathy)으로 빠졌다.8)

이러한 지적 및 도덕적 늪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도달했고 그는 대단히 힘차게 재조직의 과업에 착수했다. 불행하게도, 그의 열의는 제국에서 작동하는 경제적 힘들에 관한 그의 이해를 능가했다.

중앙 집권화된 관료제와 관련된 마비를 극복하려는 시도로, 그는 제국의 행정을 지방 분권화했고 세 명의 “부(副)황제(associate emperors)” 아래 세 개의 새로운 권력 중추를 창설했다. 화폐가 완전히 가치가 없었으므로, 그는 현물 납부에 기반을 둔 조세 체계를 고안했다. 이 체계는, 토지에 묶이는 것(ascripti glebae)을 통하여, 하층 계급들의 자유를 완전히 파괴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그들은 농노가 되었고 세금이 마련되도록 보장하기 위하여 토지에 묶였다.

그러나 가장 흥미 있는 “개혁들(reforms)”은 통화 그리고 가격들과 임금들에 관한 것들이었다. 통화 개혁이 먼저 왔고, 이 개혁이 실패작이라는 점이 명백해진 후에, 가격들과 임금들에 관한 칙령이 뒤따랐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가치가 저하된 금화와 은화의 생산을 중단시킴으로써 통화에 대한 대중 신뢰를 심어주려고 했었다.

켄트에 따르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서 솔직하게 구리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밖에 다른 어떤 것인 척하지 않는 새 데나리온을 발행했다. 이렇게 할 때 그는 새로운 가치 표준을 수립했다. 이것이 가격들에 미친 영향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상향 재조정이 있었는데, 매우 상향이었다.9)

새로운 주화는 한동안 가격들에 약간의 안정을 주었지만, 불행하게도, 가격 수준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판단하기에, 여전히 너무 높았는데, 그는 곧 자기가 새로운 딜레마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통화의 공식적인 과대평가의 주요 이유는 대규모 군대와 거대한 관료제―근대 정부에 상당하는 것―를 지탱할 자금을 제공한 것이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선택은 더욱더 가치 없는 데나리온을 계속해서 주조하는 것 아니면 “정부 지출들(government expenditures)”을 삭감하고 그리하여 그것을 주조할 필요를 줄이는 것 중 하나였다. 현대 용어법으로, 그는 계속해서 “통화를 팽창시킬(inflate)” 수도 있었고 아니면 경제의 “통화를 수축시키는(deflating)” 과정을 시작할 수도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통화 수축(deflation), 즉 민간 및 군사 정부의 비용들을 줄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결정하였다. 반면에,

통화를 팽창시키는 것도 장기적으로는 똑같이 파멸적일 것이다. 제국을 완전한 붕괴 직전으로 가져온 것은 통화 팽창(inflation)이었다. 통화의 개혁은 그 해악을 억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었는데, 그것이 자기의 과업에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이 고통스럽게 명백해지고 있었다.10)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계속해서 통화를 팽창시키지만, 자기가 생각하기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방식으로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것은 이러한 외관상 절망적인 상황에서였다. 그는 재화들과 서비스들의 가격들을 고정시키는 일과 공식적인 통화가 얼마의 가치가 있는지를 결정할 사람들의 자유를 정지시키는 일을 동시적으로 함으로써 이것을 하려고 했다. 서기 301년의 유명한 칙령은 이 목적을 달성하도록 설계되었다. 그것의 입안자들은 만약 자기들이 재화들과 서비스들로 나타낸 데나리온에 대해 하나의 보편적인 가치(universal value)―그것의 실제 가치를 따라가는 것에서 완전히 벗어난 가치―를 시행할 수 없다면 자기들이 고안했었던 체제가 붕괴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칙령은 그것의 범위가 전반적이었고 규정된 처벌들은 가혹했다.

칙령은 서기 301년에 정식으로 공포되었는데, 켄트에 따르면, “전문(前文)은 상당히 길고, 라틴어로 작성된 어느 것만큼이나 어렵고, 모호하며, 장황한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11)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매일 제국의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 그러한 전면적인 법률을 공표하는 데서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는 자기의 조치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당한 수사(修辭)를 사용하는데, 그 이전에 사용되었고, 변형들과 함께, 그 이후 대부분의 시간들과 장소들에서 사용되었던 수사이다.

그는 우선 자기의 많은 직함들을 열거하고 그 다음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국가적 명예와 존엄 그리고 로마의 권위는 우리 국가의 부(富)도 역시 . . . 성의를 다하여 관리될 것을 요구한다. . . . 확실히, 만약 어떠한 자제 정신이든, 극도로 심하고 끝이 없는 탐욕이 부추겨지는, 관행들을 억제하고 있다면 . . . 사람들의 마음들의 단결된 인내력이 이 혐오스러운 극악과 비참한 상태를 개선할 것이므로, 우연히 우리의 눈을 감기고 우리의 평화를 유지할 여지가 남아 있을 것 같지만 [이 탐욕이 자제될 것 같지 않으므로] . . . 인류가 혼자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었던 오래 기대하던 결과가, 우리의 사전 숙고가 암시하는 개선책들에 의해, 모든 것들의 일반적인 경감에 제공되도록, 정의가 그 경우 조정자로서 개입하는 것이 전 인류의 방심하지 않는 부모들인 우리들에게 [“부모들(parents)”이라는 용어는 자기의 동료 정제(正帝ㆍAugustus)와 두 부제(副帝ㆍCaesars)를 나타낸다] 적합하다.12)

≪고대 로마의 평민들(The Common People of Ancient Rome)≫에서, 프랭크 애벗(Frank Abbot)은 칙령의 본질을 다음과 같은 말들로 요약한다.

가격들을 자기가 정상 수준이라고 여기는 것에로 하락시키려는 자기의 노력에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거래를 억제하는 공모들을 억압하려는 우리의 시도들에서 우리가 시험하고 있는 것과 같은, 어중간한 조치들에 만족하지 않았고, 그는 대담하게 쇠고기, 곡물, 달걀들, 의복 그리고 다른 물품들이 팔릴 수 있는 최고 가격들을 [또한 모든 종류의 근로자들이 받을 수 있는 임금들도] 고정했고 자기 상품들을 더 비싼 값에 처분하는 누구든 사형에 처하겠다고 하였다.13)

칙령의 결과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사실상, 다른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는 소수의 황제들을 제외한 모든 황제들보다 더 영리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칙령의 첫 결과들 중 하나가 큰 퇴장(退藏) 증가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즉, 만약 농부들, 상인들, 그리고 장인들이 자기들의 재화들에 대해 자기들이 공정한 가격이라고 여기는 것을 받을 것을 기대할 수 없다면, 그들은 그것들을 팔려고 내놓지 않을 것이고, 법률(이나 왕조)의 변경을 기다릴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식품이나 사용에 필요한 재화들을 가지고 있어서, 이 규제 후에 그것들이 시장에서 회수되어도 좋다고 생각했을 사람도 역시 그러한 죄를 면하는 것으로 간주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필요를 야기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법령들에 반하여 필요를 사용하는 사람에 대해서보다 형벌[즉, 사형]은 더욱더 무거워야 하기 때문이다.14)

재화를 법률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높은 가격에 구매한(purchased) 누구에게든 [사형이라는―옮긴이 주] 흔히 있는 처벌을 규정하는 또 하나의 조항이 있었다. 다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러한 경제 규제 시도들의 통상적인 결과들을 잘 알고 있었다. 반면, 적어도 한 측면에서 칙령은 최근 시대의 많은 규제들보다 (경제적 관점에서) 더 계몽되어 있었다. “재화들이 명백히 풍부할 곳들에서는, 그것에 의해 싼 가격들의 행복한 상태가 방해받지 않을 것이다―그리고 만약 탐욕이 제한되고 억제된다면, 염가가 충분히 제공된다,”고 그것은 선언한다.15)

(“소매가격 유지(retail price maintenance),” “공정 거래 법률들(fair-trade laws)” 그리고 국제 항공 운송 협회(International Air Transportation Association) 같은 다양한 가격 고정 기관들을 견뎌야 했던 현대 국가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로부터 유용한 교훈을 잘 배울 수 있을 것인데, 그는 적어도 가격을 낮추는(lower) 것을 항상 합법적으로 하였다.)

가격표들의 일부들은 대략 30개의 상이한 장소에서, 대개 그리스어를 쓰는 제국 부분들에서, 발견되었다. 천 개를 훨씬 넘는 개별 가격이나 임금을 망라하는, 적어도 32개의 목록이 있었다.

그 결과들은 예상 밖이 아니었고, 우리가 보았듯이, 칙령의 어법으로부터, 황제 자신이 예상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그리고는 그는 모든 판매 가능한 물건들의 가격들을 규제하려고 노력하였다. 매우 경미하고 하찮은 이유로 많은 유혈이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식량들에 대해 합리적인 가격을 받을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그것들을 더 이상 시장에 내놓지 않았는데, 이것은 기근을 매우 증가시켜서 마침내 많은 사람들이 그것으로 죽은 후에야 법률 자체가 폐기되었다.16)

이 구절에서 암시된 유혈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약속된 처형들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정부에 의해 야기되었고 얼마나 많은 부분이 간접적으로 야기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시대에 관한 역사가 롤런드 켄트는 피해의 많은 부분이 간접적이었다고 믿는다. 그가 결론짓기를,

바꿔 말하면, 칙령의 위반에 대해 법령에 사형이 규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칙령에 설정된 가격 한계들은 상인들에 의해 준수되지 않았다. 구매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은, 가격들이 법적 한계를 넘는 것을 발견하면, 비록 재화들이 결국 그저 사소한 가치만 가지고 있을지라도, 폭도들을 만들어서 위반하는 상인들의 시설들을 파괴했고, 부수적으로 상인들을 살해했다. 상인들은 제한들이 제거될 날에 대비하여 자기들의 재화들을 퇴장(退藏)시켰고, 그 결과로 실제로 팔려고 내놓은 상품들이 부족하게 되어 더욱더 큰 가격 증가가 일어났으며, 그래서 계속된 무슨 거래든 불법적인 가격들에서 이루어졌고 그러므로 은밀하게 이루어졌다.17)

칙령이 정확하게 얼마나 오랫동안 시행 중인 채로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자기의 좋지 못한 건강을 초래하는 통치의 긴장과 걱정거리들을 열거하면서, 임금들과 가격들에 관한 법령이 반포된 4년 후 퇴위했다는 점은 알려져 있다. 그것은 확실히 그것의 저자의 퇴위 후 사문화하였다. 칙령과 관련된 통화 개혁 4년 이내에, 데나리온으로 나타낸 금의 가격은 250퍼센트 상승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민중을 속이지 못했었고 자기들이 적합하다고 본 대로 사고 파는 사람들의 능력을 억압하지 못했었다. 칙령과 통화 “개혁(reform)”의 실패는 더욱 전통적인 재정 무책임으로의 복귀를 초래하였고 서기 305년까지는 통화 가치 저하의 과정이 다시 시작됐었다. 세기가 바뀔 때까지는, 이 과정은 데나리온으로 나타낸 금의 가격에서 2,000퍼센트 증가를 낳았다.

이것들은 있을 수 없는 수치들이고 청동 데나리온과 금 파운드(약 373그램―옮긴이 주) 사이의, 주조 비율은 차치하고, 시장을 보존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실패했다는 점을 의미할 뿐이다. 프랑스 “아시냐 지폐(assignatsㆍ1789년부터 1796년 사이에 프랑스 혁명 정부가 발행한 지폐―옮긴이 주),”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독일 마르크(mark),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헝가리 펜거(pengo)는 선례가 없는 현상들이 아니었다.18) . . . 동전들은 매우 쉽게 제조될 수 있었다. 화폐 연구가들(numismatists)은 4세기의 주화들이 종종 급하고 부주의한 주조의 흔적들을 지니고 있다고 증언한다. 그것들은 많은 경우 적절하게 깎아 다듬거나 어지간히 모양새 좋게 되지 않고도 유통에 내밀렸다. 화폐 주조소들의 이러한 급한 조작은 가치가 없거나 거의 가치가 없는 지폐를 마구 남발하는 우리의 현대 인쇄소들과 꼭 마찬가지로 효과적이었다.19)

지도적인 로마사가인 M. 로스토프체프(M. Rostovtzeff)는 이 불행한 경험을 이런 말들로 요약했다.

똑같은 방편이 그 이전에 종종 시험되었었고 그 이후에 종종 시험되었다. 위급한 기간에 일시적인 조치로서, 그것은 다소 소용이 있을지 모른다. 지속될 작정인 일반적인 조치로서, 그것은 어떠한 완화도 가져오지 않고 반드시 큰 피해를 끼치며 무서운 유혈을 야기하게 되어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국가의 전능에 대한 고대 세계의 유해한 신념을 공유했는데, 많은 현대 이론가들이 계속해서 그와 그리고 그것과 공유하는 신념이다.20)

비록 경제를 통제하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시도가 완전한 실패로 끝났고 그가 퇴위하지 않을 수 없었을지라도, 그의 후계자, 배교자 율리아누스(Julian the Apostate)가 동일한 옛날의 입장으로 돌아온 것은 그저 60년 후일 뿐이었다. 그 시대에 관한 탁월한 역사가인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은 역설적(逆說的)으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황제는 법적 권한으로 곡물의 가치를 고정하는 매우 위험하고 의심스러운 조치를 감행했다. 그는, 부족한 기간에, 그것이 가장 풍부한 시기에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가격에 팔려야 한다고, 그리고 자기 자신의 모범이 자기의 법률들을 강화할지 모른다고, 법령으로 규정했다[그는 고정된 가격에 자기 자신의 곡물을 대량으로 시장에 들여보냈다]. 그 결과들은 예견되었을지 모르고 곧 느껴졌다. 황제의 밀은 부유한 상인들에 의해 구매되었다. 토지나 곡물의 소유자들은 그 도시로부터 언제나 있었던 공급을 보류하였고, 시장에 나타나는 소량은 선불이고 불법적인 가격에 비밀리에 팔렸다.21)

필사적인 조치로서, 다음의 황제들은 근로자들이 일정 직업들에 규정된 낮은 임금들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일자리들을 바꾸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근로자들을 토지에나 그들의 아버지들의 직업들에 묶으려고 하였다. 물론, 이것은 법으로 임금들을 통제하려는 시도의 궁극적인 결과였다.

많은 근로자들을 위한 유일한 합법적 탈출구는 자청하는 대체 근로자를 찾아서 그 다음 자기들의 모든 재화들을 그에게 양도하는 것이었다. 이전에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자기 직업을 떠난 사람을 전쟁터에서 탈영한 군인에 비유했었다.22)

역사가 리비는 아래와 같이 언명함으로써 그 제국의 경제에 관한 자기의 개관을 결론짓는다.

국가 개입과 참담한 재정 정책은 전 제국을 멍에에 시달리게 했다. 몇 번이고, 가난한 사람들도 부자들도 이방인들이 자기들을 그것에서 구해내 주기를 기도했다. 서기 378년에 발칸 반도의 광산업자들은 서고트 족(Visigoth) 침략자들에게 한 무더기로 넘어갔고, 서기 500년 직전에 사제 살비아누스(Salvian)는 전반적인 이민족 지배 감수를 표현했다.23)

로버트 L. 슈팅거(Robert L. Scheuttinger)와 에이먼 버틀러(Eamonn Butler)는 미국에서 닉슨 대통령의 통제들의 종료 직후, 1974년에 ≪40세기의 임금 및 가격 통제(Forty Centuries of Wage and Price Controls)≫에 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기원전 2000년부터 서기 1978년까지 서른 개의 상이한 국가에서 임금 및 가격 통제에 관해 백 개를 넘는 사례를 검토했다. 저자들과의 특별한 협정으로, 미제스 연구소는 고대 세계부터 현대 시대까지의 우스꽝스러운 경제 정책에 대한 이런 대중 안내서를 재도입하게 되어 아주 흥분된다.

이 논문은 ≪40세기의 임금 및 가격 통제: 인플레이션과 싸우지 않는 방법(Forty Centuries of Wage and Price Controls: How Not to Fight Inflation)≫이라는 책, 제2장, “로마 공화국과 제국(The Roman Republic and Empire)”에서 발췌되었다.


글쓴이) Robert L. Scheuttinger ⦁ Eamonn F. Butler

⦁ 로버트 L. 슈팅거는 버몬트 주 샬럿(Charlotte)에 있는 원룸(one-room) 교사(校舍)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후에 노벨상 수상자이자 미제스 연구소 창립 이사인 F. A. 하이에크 밑에서 시카고 대학교 사회사상 위원회(Committee on Social Thought)에서 공부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또한 랠프 레이코(Ralph Raico)와 함께 ≪새 개인주의자 평론(New Individualist Review)≫을 편집 발행하기도 했다.

⦁ 에이먼 F. 버틀러는 애덤 스미스 연구소 소장이다.

옮긴이) 황수연(전 경성대 교수)

원문) https://mises.org/library/price-fixing-ancient-rome

  • 1. Jean-Philippe Levy, The Economic Life of the Ancient World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7), p. 55.
  • 2. 상게서, pp. 68-69.
  • 3. 상게서, p. 72.
  • 4. 상게서, p. 89.
  • 5. 상게서, p. 94.
  • 6. Roland Kent, “The Edict of Diocletian Fixing Maximum Prices,” The University of Pennsylvania Law Review, 1920, p. 37을 보라.
  • 7. 상게 논문, pp. 37-38.
  • 8. H. Michell, “The Edict of Diocletian: A Study of Price Fixing in the Roman Empire,” The Canadian Journa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 February 1947, p. 3.
  • 9. Kent, 전게 논문, p. 39.
  • 10. Michell, 전게 논문, p. 5.
  • 11. Kent, 전게 논문, p. 40.
  • 12. 상게 논문, pp. 41-42.
  • 13. Frank Abbot, The Common People of Ancient Rome (New York: Scribner, 1911), pp. 150-151.
  • 14. Kent, 전게 논문, p. 44.
  • 15. 상게 논문, p. 43.
  • 16. L. C. F. Lactantius, A Relation of the Death of the Primitive Persecutors, Gilbert Burnet 옮김 (Amsterdam, 1697), pp. 67-68.
  • 17. Kent, 전게 논문, pp. 39-40.
  • 18. Michell, 전게 논문, p. 11.
  • 19. 상게 논문, p. 12.
  • 20. M. Rostovtzeff, The Social and Economic History of the Roman Empire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57).
  • 21. Edward Gibbon, 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New York: Fred de Fau, 1906) Vol. 4, pp. 111-112.
  • 22. Levy, 전게서, p. 97.
  • 23. 상게서, p. 99.
Authors:

Eamonn F. Butler

Eamonn Butler is director of the Adam Smith Institute. See his website.

Robert L. Scheuttinger

Robert Schuettinger was educated in a one-room schoolhouse in Charlotte, Vermont. He later studied under Nobel Laureate and Mises Institute founding board member F.A. Hayek at the Committee on Social Thought of the University of Chicago, where he also edited the New Individualist Review with Ralph Raico.

Image source:
Get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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